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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데릭 데 클레르크

입력
2017.01.31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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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2.1

1994년 총선에서 아프리카민족회의(ANC)가 압승한 뒤 넬슨 만델라와 함께 지지자들 앞에 선 프레데릭 데 클레르크(왼쪽). 자료사진
1994년 총선에서 아프리카민족회의(ANC)가 압승한 뒤 넬슨 만델라와 함께 지지자들 앞에 선 프레데릭 데 클레르크(왼쪽). 자료사진

남아프리카공화국 인종차별정책(Apartheid) 폐지의 영웅은 물론 넬슨 만델라(1918~2013)지만, 아파르트헤이트의 7대 대통령이자 마지막 대통령 프레데릭 데 클레르크(Fredrik de Kelek, 1936~)가 없었다면 그 과정은 훨씬 험난했을 것이다. 1948년 시작된 흑백분리정책을 포기한 것도, 인종차별법(1991년 2월 1일)을 폐지한 것도 데 클레르크였다.

요하네스버그(옛 트랜스발)의 유력 정치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법학을 전공해 변호사로 일하다 41세 되던 1978년 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면서 정치인이 됐다. 78년 각료로 임명돼 체신, 통신, 복지부, 교육부 장관을 거쳤고, 89년 보타(Botha) 전 대통령의 뒤를 이어 보수 국민당(NP) 당수가 된 뒤 그 해 8월 대통령 임기를 시작했다. 그의 증조부는 상원의원이었고, 숙부는 총리, 아버지도 국민당 당수를 지내며 인종차별정책의 토대를 닦은 장본인이었다. 그의 지역구 트랜스발은 40년대 이후 보수 차별주의의 아성으로 통했고, 그는 선대의 정치적 자산과 전통을 계승한 정치인이었다.

그는 취임 두 달 뒤 반체제 흑인지도자 8명을 전격 석방했다. 이듬해 2월, 당시엔 불법 무장단체로 통하던 아프리카민족회의(ANC)를 합법화하면서 종신형(62년~ 90년 복역)을 살던 넬슨 만델라를 석방했다. 다시 넉 달 뒤 출생과 동시에 인종 분리 등록을 의무화한 ‘주민등록법’, 거주지 및 영업지역을 제한한 ‘집단지구법’ 등 상징적인 악법을 철폐했다. 차별 철폐와 새로운 다인종 화합 정치모델을 걸고, 또 스스로는 대통령직을 걸고, 불투명한 미래에 불안해하던 백인들만을 상대로 벌인 92년 3월의 국민투표에서 그는 68.6%의 지지율로 승리했다. 만델라의 아파르트헤이트 철폐는 저항군의 주력을 무장해제시킨 데 클레르크의 순풍을 타고 돛을 올렸다.

긴 차별정책과 유혈 충돌로 인한 내정 불안, 아프리카 이웃 국가를 비롯한 국제 사회의 경제 제재, 30%를 웃돌던 실업률과 경제침체 등이 데 클레르크의 결단을 앞당긴 요인이었음을 부정하긴 힘들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관성으로 버텨보려는 완고한 반동정치가 역사에는 훨씬 흔하다. 그 끝은 대개 참담한 비극으로 이어지곤 했다.

94년 5월 만델라에게 권력을 이양한 그는 2년간의 대리통령(deputy president)으로 만델라를 도운 뒤 97년 정계 은퇴, 평화재단 등을 설립해 활동 무대를 국제사회로 넓혔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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