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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더 큰 난을 부르는 사법부의 오만

입력
2018.07.01 20:00
수정
2018.07.01 21:07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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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이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수사와 관련해 법원행정처 문건이 담긴 하드디스크 원본을 요구하면서 2015년 원세훈 전 국정원장 선거법 위반 재판 당시 증거능력 시비를 예로 든 데 대해 사법부가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과거 대법원의 판단대로라면 재판에서 증거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자료를 던져줬다는 검찰 얘기에 대해서 말이다.

원세훈 재판에선 국정원 선거 개입의 핵심증거가 된 이른바 ‘지논ㆍ시큐리티’ 파일의 증거능력 여부 판단이 1ㆍ2ㆍ3심을 거치는 동안 롤러코스트를 탔다. 지논 파일은 2012년 18대 대선 전 수개월간 원 전 원장 지시사항의 요점 등을 적어둔 파일로 지논은 논지를 거꾸로 적어둔 파일명이다. 시큐리티 파일은 이 파일을 소지하고 있던 국정원 심리전단 직원이 자신이 이용하던 트위터 계정 30개를 포함해 정치ㆍ선거활동에 사용한 수백 개 트위터 연결계정이 들어 있어, 검찰은 두 파일을 선거법 위반 혐의의 핵심 증거로 사용했다. 하지만 파일 소지자인 국정원 직원이 검찰에서의 진술과는 달리 법정에서 “파일을 직접 작성했는지, 전달받았는지 기억나지 않는다”고 부인하면서 1심 재판부는 두 파일의 증거 능력을 인정하지 않은 반면, 2심은 신용할만한 정황에 의해 작성된 문서라는 형사소송법 315조를 들어 증거능력을 인정, 선거법 유죄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국정원 직원이 부인하고, 두 파일의 상당부분이 출처를 알기 어렵고 정보의 근원, 기재 경위, 내용이 불분명하다며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고 파기환송했다. 디지털 자료의 증거능력이 법리적 쟁점이 됐던 형사소송법 313조는 이듬해 5월 대대적으로 개정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진술서 작성자가 재판에서 부인하는 경우에도 과학적 분석결과에 기초한 디지털포렌식 자료, 감정 등 객관적 방법으로 증명된 때에는 증거로 할 수 있다는 내용이 추가됐다.

하드디스크 원본이 아니라 사법부가 넘겨준 사법행정권 남용 의심 문서만으로는 법정에서 증거능력이 부인될 수 있다는 게 검찰의 문제의식이다. 당연히 법 전문가인 사법부 판사들이 이를 모를 리 없을 것이니, 흔히 말하는 ‘진정성’ 즉 진상규명이나 김명수 대법원장까지 강조한 수사 협조 의지에 의심을 품을 만하다. 법원의 허가를 받아서 강제수사를 할 수밖에 없는 ‘을’의 위치인 검찰이 ‘알만한 사람들이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고 하는 판이니 이런 수모도 없다.  

사법부 처지가 왜 이 지경에 이르게 됐는지 참담한 노릇이다. 법관의 독립성을 침해하는 판사 뒷조사, 박근혜 청와대와의 재판거래 의혹과 삼권분립 훼손 정황까지 드러내는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 문건은 오히려 오랜 기간 통제와 견제를 받지 않았던 사법권력이 삼권분립의 우산 아래서 알게 모르게 키워온 오만의 산물이 아닐까 싶다. 양승태 대법원장이 추진하던 상고법원을 위헌적 발상이라며 반대하던 대한변호사협회장에 대한 불법적인 뒷조사와 다각적인 압박 정황 문건까지 나왔으니 할 말을 잃는다. 삼권분립과 판사의 신분을 보장하는 헌법과 만연한 갈등의 시대에 그나마 유일한 심판자, 분쟁 조정자로서의 전문가적 권위는 지켜줘야 하지 않겠느냐는 사회 일반의 암묵적 동의에 대한 심각한 배신 행위다.

새 대법원장이 오랜 법원 내부 토론을 거친 우여곡절과 장고 끝에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겠다고 검찰 수사에 어쩔 수 없이 기댔지만, 하드디스크 논란 등을 보면 권위의 미망에 사로잡혀 있고, 여전한 오만을 드러낸다. 변협회장 뒷조사 문건만 하더라도 법관 독립 등과 관계된 사법행정권 남용과 거리가 멀다며 공개를 하지 않았다니 '눈 가리고 아웅'도 이만저만 도를 넘는 게 아니다. 실로 들어본 적이 없는 전대미문의 사건에 이 정도 인식밖에 하지 못한단 말인가. 지금의 사법부가 뭘 걱정하고 우려하는지 알 수 없으나 본래 난(亂)을 제대로 바로잡지 못하면 결국은 더 큰 난을 부르는 법이다.

정진황 사회부장 jhch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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