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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월회 칼럼] 상상력이 ‘착한’ 이들의 존엄

입력
2017.12.11 13:54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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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대학의 교수들이 자기 논문에 중ㆍ고등학생 자녀 이름을 넣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기초과학연구원의 연구단장인 서울대 교수가 미국 내 자기 집에 묵으면서도 출장비 명목으로 수천만 원을 횡령했다는 뉴스도 들려왔다. 문득 징자(澄子)란 인물이 떠올랐다. 하나도 유명하지 않은 인물이지만 그와 관련된 일화가 ‘여씨춘추’에 전한다.

그는 춘추전국시대 사람으로, 하루는 길에서 검은 옷을 잃어버렸다. 옷을 찾아 나선 그의 눈에 마침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이 띠었다. 냉큼 다가선 그는 다짜고짜 옷을 벗겨 가져가려 했다. 여인이 옷을 꼭 쥐고 놓지 않자 당당하게 말했다. “방금 내가 검은 옷을 잃어버렸소.” 그러자 여인이 대꾸했다. “나리께선 검은 옷을 잃어버리셨나 봅니다. 허나 이 옷은 제가 직접 지어 입은 것입니다.” 순간 징자는 사뭇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곤 을러댔다. “얼른 옷을 내게 주는 것이 나을게요. 내가 잃어버린 옷은 두 겹짜리인데 지금 그대 옷은 홑겹이오. 홑겹으로 두 겹과 맞바꾸는 것이니 그대가 남는 장사 아니겠소?”

아쉽게도 ‘여씨춘추’엔 그래서 어찌 됐다는 결말까지 실려 있진 않다. 하지만 필자의 촉으로는, 그 여인은 결국 옷을 빼앗겼을 것이고 징자는 아무런 죄책감도 못 느낀 채 잘 먹고 잘 살았을 것이다. 이천 년도 더 된 오랜 옛날, 저쪽 중국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그런 상황이 전혀 낯설지 않다. 문명이 고도로 발달하고 진보했다고 자부하는 오늘날에도, 적반하장이 공공연하게 자행되는 일이 여전히 다반사처럼 벌어지고 있기에 그렇다. 징자 같은 이들은 지금 여기서도 변함없이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퍽 궁금해진다. 인간의 도덕적 본성을 마비시키고, 인간답게 살라고 자연이 선물한 이성이나 감성, 직관 같은 역량을 악용케 하는 힘의 정체가 말이다. 동료교수 중 한 분은 이를 ‘상상력’이라고 표현했다. 상상력의 보고인 문학을 전공한 자신조차 생각해내지 못했던 것이라며 혀를 찼다. ‘기가 찬’ 상상력이란 뜻이다. 인간에게 고유한 역량으로, 문명의 진보를 일궈내는 데 기여한 ‘착한’ 상상력과는 엄연히 다른 유의 상상력이다.

단적으로 ‘더러운 상상력’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비유컨대 악성 종양이다. 이에 걸리면 인간을 탁월하게 만들어주는 제반 역량이 온통 흉기로 변한다. 이성은 탐욕을 거머쥐는 데 악용되고, 감성은 마음이 악행에 무뎌진 악마를 닮아가게 한다. 그렇게 인간다움은 시나브로 소거된다. 그러다 전이가 진척되면 삿된 욕망이 자아를 점령한다. 하여 세상은 응당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착란에 빠져든다. 자아가 더러운 상상력에 된통 감염돼 자기를 객관화할 수 있는 역량이 고갈된 탓이다.

물론 이런 증세가 늘 겉으로 드러나는 건 아니다. 그래서 항상 주시해야 한다. 자기 이익 실현에 필요하다 싶으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심각한 병증으로 발현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요새 흔하게 목도되는, 일부 언론과 정치인 그리고 종교인이 앓고 있는 ‘막말의 일상화’ 증상처럼 말이다. 그들의 막말은 그저 ‘아무 말’인 게 아니라 ‘더러운 말’이기에 그렇다. 그것은 얼토당토않은 말에 불과한 게 아니다. 저변에는 삿된 욕망을 관철시키고자 하는 더러운 상상력이 꿈틀대고 있기에 그렇다. 그 덕에 기득권 수호나 확대 재생산은 가능해졌을지라도, 그 대가로 치른 인간으로서의 존엄 상실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기에 가능한 결과다.

상상력이 ‘착한’ 이들, 달리 말해 상상력을 더럽게 악용하지 않는 이들은 사뭇 다르다. 조금만 비겁해지고 한 번만 외면하면 큰 이익을 볼 수 있다고 해도 그들은 차마 그렇게 하지 않는다. 아무리 정당화하고 미화해도 그 실질은 언제나 더럽고 삿되기 때문이다. 하여 이들은 인간다움을 잃지 않는다. 아니 더욱 확장해간다. 이것이 상상력이 착한 이들의 존엄이다. 역사가 수많은 악인과 악행으로 점철된 듯하지만 인류가 진보에 진보를 거듭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그래서 이들은 누림이 커질수록 한층 존엄해지고자 노력한다. 인간이 사회를 이루고 사는 한, 누리면 누릴수록 ‘존엄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존엄하기’ 위해 살아가야 함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또한 돈과 권력을 많이 지녔다고 자동적으로 존엄해지지도, 말로 존엄을 외친다고 하여 실제로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니기에 더욱더 그러하다. 게다가 존엄은 철저하게 타인과 관계 속에서, 자기를 향한 존중이 그들로부터 비롯됐을 때 싹트고 성장하며, 자신이 그것 앞에 존경을 표할 때 지속적으로 구현되기에 그렇다.

한마디로 존엄은 타인과 관계 속에서 스스로가 존엄을 지켜가고자 할 때 비로소 생성되고 지속될 수 있다. 추악한 행위를 서슴없이 일삼는 몸이나 막말을 쏟아내는 입은 존엄과 무관할 따름이다. 그러니 더러운 상상력을 상용하여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면 뭐하겠는가. 그 자신은 인간다움을 포기한, 존엄은커녕 역사에 더러움의 표상이 됐으니 말이다.

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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