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박소영 기자

등록 : 2017.02.07 20:12
수정 : 2017.02.07 20:29

“성폭력 피해 알려지자 돌아온건 해고와 고소장”

[사소한소다]<23> ‘디자인소호’ 규탄 기자회견 현장

등록 : 2017.02.07 20:12
수정 : 2017.02.07 20:29

7일 서울 프레스센터 언론노조 사무실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발언하고 있다. 왼쪽부터 박세중 전국언론노동조합 서울경기지역출판지부장, 김린 여성 디자이너 정책연구모임 'WOO'대표, 김환균 전국언론노동조합 언론노조 위원장, 박진희 전국언론노동조합 출판노조협의회 여성위원. 언론노조 제공

“성추행을 겪고 명예훼손 고소를 당한 후 재판까지 겪어가면서 자아가 무너져내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생이 됐다.

대학 때부터 디자인만 바라보며 제 꿈을 이루는 날을 고대해 왔지만 이제는 디자인이 너무나 싫다. 왜 피해자인 제가 꿈을 포기해야 하나.”

7일 오전 서울 프레스센터 언론노조 사무실에서 열린 ‘직장 내 성폭력 피해자 해고하고 고소한 디자인소호 규탄 기자회견’에 참석한 피해자 A(28)씨는 떨리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준비해 온 성명서를 읽었다. A씨는 20여분간 성명서를 읽으며 지난 10개월간 자신이 감당해야 했던 신체적, 정신적, 경제적 고통에 대해 호소했다.

가해자는 감봉, 피해자는 해고… 공론화 했더니 ‘명예훼손’

유명 편집디자인회사의 신입사원으로 일하던 A씨는 지난해 5월, 회사 선배들과의 술자리 자리에서 성추행을 당했다. A씨가 스트레스로 회사에서 쓰러진 후 추행 사실이 회사에 알려졌지만, 가해자들은 수개월의 감봉처분에 그친 반면 A씨는 해고 통보를 받았다. 5~10분 지각 등 업무태만이 이유였다. A씨는 “정규직으로 채용된 줄 알았는데 사측이 6개월 인턴이라 해고할 수 있다고 했다”며 근로계약서 사진을 첨부해 온라인에 게재했다. 회사측은 명예훼손을 당했다며 A씨를 고발했고, 검찰은 그를 기소했다.

정신적 고통뿐만 아니라 경제적 어려움까지 겹쳐 벼랑 끝에 몰린 A씨는 지난해 8월 온라인에 유서를 올린 후 자살을 기도했다가 응급실로 호송됐다. 한편 사측은 A씨의 유서 내용을 문제 삼으며 또다시 명예훼손과 업무방해 혐의로 A씨를 고소했다.

A씨는 “가해자 중 한 명은 자신이 ‘온갖 악플에 시달리며 인간쓰레기 취급을 받았다’면서 내가 (소송비용을 위한) 모금활동을 하는 것에 대해 ‘요즘 유행하는 페미니즘을 이용해 여성혐오 프레임을 씌우려고 하는 것이 아니냐’ ‘모금활동으로 금전이익을 취하고 있다’고 주장했다”고 말했다.

10개월 소송 끝 무죄 받았지만… 만신창이 된 피해자

A씨는 지난해 9월부터 언론노조 서울경기지역출판지부에 가입해 법률대응을 벌여왔다. 그리고 지난 2일, 서울북부지법은 회사측의 1차 고소에 대해 성폭력 피해당사자가 ‘허위사실을 유포해 회사의 명예를 훼손한 것으로 볼 수 없다’는 취지로 무죄를 선고했다.

무죄 판결에도 불구하고 A씨는 이번 사건이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파괴했다고 호소한다. 지난 10개월간 중증 우울증과 공황장애, 불안장애에 시달리며 지금까지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는 것. “성폭력 피해 사실을 주변에 알리지 못해 자연스럽게 인간관계도 망가졌다. 어려운 가정환경 때문에 홀로 서울에서 힘겹게 대학을 다니면서도 꿈을 위해 버텨왔는데 이번 사건으로 모든 것이 망가졌다”고도 했다.

무죄판결을 받은 피해자가 오히려 디자인을 포기하는 수순이 돼 가는 것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가해자들은 회사에서 멀쩡히 사측의 비호를 받으면서 근무하고 있는데 왜 제가 잘못한 사람인양 자숙의 시간을 가져야 하나. 이미 반쪽이 나버린 포트폴리오와 망가진 제 커리어를 소생하기엔 그들이 망쳐놓은 것이 너무나 많다”고 호소했다. 유서에 대해 제기된 2차 고소에 대한 소송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반면 이 회사는 지난달 23일 국가인권위원회의 2017년 인권잡지 제작 및 발송 담당 업체로 선정됐다. 전국언론노동조합언론노조 김환균 위원장은 “성폭력 피해자를 해고하고 고소한 회사가 인권잡지를 만든다는 사실은 참으로 아이러니하고 염치없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언론노조 제공

출판계 “성폭력 피해자 77%, 회사측에 문제제기 안 했다”

A씨의 사례는 문화예술계에서 드문 일이 아니다. 박세중 언론노조 서울경기지역출판지부장은 기자회견에서 “이 사건은 특정 회사, 특정 업계만의 일이 아니다”라며 “성폭력 피해 고발로 우리 지부와 면담을 진행한 한 회사는 ‘우리 출판사는 문화예술위원회가 선정한 우수문예지를 출판한 출판사인데, 확인되지 않은 사실로 명예를 훼손했다’고 당사자 탓을 했다”고 말했다.

좁은 문화예술계의 공고한 카르텔이 피해자들의 문제제기를 근본적으로 막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지난해 온라인상에서 #문화계_내_성폭력 해시태그를 달고 문화예술계 종사자들의 성폭력 피해 고발이 봇물 터지듯 나오자 지난해 11월 언론노조 서울경기지역 출판지부는 전ㆍ현직 출판계 종사자 257명을 대상으로 ‘2016 출판계 성폭력 실태조사’를 진행, 발표했다. 이 조사에 따르면 직장 내에서 성폭력 사건을 겪었다고 응답한 피해자의 77.3%는 사건 발생 후 회사 측에 문제제기조차 하지 않았다. 박 지부장은 “문단 내 성폭력 고발을 시작으로 없었던 문제가 아니라 그간 있었지만 드러나지 않았던 문제들이 하나씩 드러나고 있다”고 말했다.

“사측ㆍ가해자들의 보복수단 된 명예훼손 고소”

성폭력을 고발한 피해자들이 사측이나 가해자들에게 명예훼손으로 역 고소를 당하는 현실도 문제다. 김환균 언론노조 위원장은 “명예훼손이 가진 자들의 억압수단으로 활용돼 왔다는 것은 여러 차례 지적돼 왔고, 이번 사건은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한 사례”라며 “큰 틀에서 명예훼손 문제를 어떻게 대처 할 것인지 고민하고 방향제시를 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여성 디자이너 정책연구모임 ‘WOO’의 김린 대표는 “지난해 10월 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문화계_내_성폭력 해시태그를 달고 성폭력 피해담이 무수히 고발되면서 권력 위계를 이용한 성폭력의 실태가 수면위로 드러났지만, 폭로 이후 피해자들은 거꾸로 가해자 측의 고소 협박 등 직간접적 보복에 고통 받고 있다”며 “이번 사건은 비단 한 명의 피해당사자가 아닌 여성 공동의 싸움이며, 여기서 승리를 거둘 때까지 모든 여성 문화예술인이 연대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언론노조는 “사측에 면담요청 공문을 보내고 기자회견 일정이 잡혔다고 밝히니 바로 사측에서 연락이 왔다. 피해당사자가 이미 고통을 받을 만큼 받았는데 너무나 늦은 대응”이라고 비판하며 “다음주 언론노조 위원장과 지부장과의 면담을 통해 사측에 강력히 요구사항을 전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박소영기자 sosyoung@ha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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