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농사 요령? 일은 당겨서 하고 먹을 것은 미뤄서 먹는 겨!

입력
2015.12.04 17:27
0 0

들깨만 터시겠다던 간전댁 할머니, 앞치마 동여매고 울타리콩도 정리

“집에 가서 할 일 있어요” 30분 졸라 겨우겨우 집 앞까지 모셔다 드려

귀농 마음 먹고 뜬구름 잡던 시절

땅과 집, 인맥과 평판까지 발 벗고 도와주신 이장 아버님

벼농사 A부터 Z까지 전수해 주셔

감자, 고추 심고 메주, 장 담글 때도 언제나 도와주신 어르신

내가 그 나이 될 때 그런 모습일까

아내도 그렇게 다정한 할머니 될까

간전댁 할머니가 농장에서 말려 놓은 들깨를 털고 있다. 3년째 들깨를 심었지만 아직도 갈무리 작업이 서툴러 도움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초보 농부임을 자백한다.
간전댁 할머니가 농장에서 말려 놓은 들깨를 털고 있다. 3년째 들깨를 심었지만 아직도 갈무리 작업이 서툴러 도움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초보 농부임을 자백한다.

들깨만 털고 가시겠다던 간전댁 할머니가 어느새 앞치마를 찾아내 허리춤을 동여매신다. 농장에 온 김에 울타리 콩까지 정리하시겠단다. “해가 아직 중천인디 왜 자꾸 가라고 그라요!” 연세도 있고 몸도 편찮으셔서 한동안 농장걸음을 못 하시게 했었다. 들깨 털고 키질하고 갈무리하는 게 아직 서툴러 할머니 도움을 받기로는 했는데 마치 ‘지금이 기회다’ 생각하신 것 마냥 바쁘게 움직이셨다. 당신 집에서 밥 먹자는 말씀을 안 들었더니 속이 상하셨던 걸까. 맛있게 드셨던 기억이 나서 할머니 집밥 대신 비빔밥 한 그릇 사드린 것에 대한 보복의 향기도 났다. “선재 아빠는 언능 생강이나 뽑아요. 나 집에 가도 할 일 없응 게 걱정허덜 말고.”

짧아진 해가 이렇게 길게 느껴진 적도 없었다. 산성봉 뒤로 어스름이 지면서 할머니를 보챘다. “할머니, 어서 가시게요. 저도 집에 가서 할 일 있어서요.” 그러고도 30분을 더 졸라서야 할머니를 차에 태웠다. 차 드나들기 불편하니 마을회관 앞에 내려달라는 말씀을 무시하고 기어코 대문 앞까지 갔다. 내가 할 수 있는 소심한 보복이다.

집으로 가는 길에 이장님 댁에 들렀다. 서울 사는 막내가 내려왔단다. 출판사를 경영하면서도 농사일 돕는다고 천리길을 매주 내려온다. 주말 이틀동안 하고 가는 일이 내가 일주일간 슬슬 하는 만큼은 된다. 상일꾼이다. 틈나는 대로 산에 가서 도라지 캐고 마 뽑아서 부모님 드시라고 정리해놓고 올라간다. 서울에서도 저렇게 일하면 갑부가 됐든 몸이 부서지든 했을 텐데, 아직 멀쩡한 걸 보면 주5일 병원에 누워있다가 내려오는 지도 모르겠다.

“아버님 계세요~” 뜰 방에 올라서며 기분 좋게 소리지르니 여닫이 문이 벌컥 열리면서 두 목소리가 동시에 터져 나온다. “어이~ 들우와.” “형님, 들어 오쇼.” 두 평 남짓한 뜨끈한 방에 들어서니 몸이 사르르 녹아버릴 것 같다. “오랜만이시. 그 동안 뭣허고 지냈는가.” 뵌 지 한 열흘쯤 되어야 하실 말씀 같은데 엊그제 건너와서 저녁 먹은 기억이 또렷하다. “맨날 콩 모아놓은 거 덮었다 제꼈다만 해요 아버님. 날씨 때문에 뭘 못하겠네요.” 이 대답도 이틀 전과 똑같다. “선재 아빠 왔어요? 밥 차리고 있은 게 같이 묵고 가요.” 오봉댁 어머님이 부엌에서 인사 하신다. 아직 밥 때는 아니었지만 어머님 밥상은 사양할 생각이 없다. 적어도 솜씨와 정성에서는 구례 바닥에서 덤빌 집이 없다.

“쌀은 많이 팔았어요?” 어머님이 꼬막 접시를 내 앞쪽으로 밀면서 물으셨다. “예. 열 댓 가마 팔렸나 봐요. 남은 건 두 달 있다가 도정해서 팔려구요.” 소주를 따라주시던 이장님도 물으셨다. “얼매씩 팔았는가.” 작년에도 비슷한 대화가 있었다. “예년이랑 똑같이 받았어요.” 재차 물으신다. “글쎄 그게 얼마씩인가.” “킬로에 4천원 받고 있어요.” 아버님은 한참 말씀을 안 하시다가 밥 숟가락을 내려 놓으셨다. 안색이 좋지 않다. 정부수매가는 그보다 훨씬 못 미친다. 어머님이 분위기 전환용 멘트를 내놓으셨다. “선재 아빠는 애써서 친환경으로 헌께 당연히 그 만큼 받아야 맞지. 안 그러요?” 아버님은 슬그머니 뒤로 돌아 앉으셨다. “내, 풀만 자신 있어두...농사야 내가 더 잘 짓는디...”

4년 전 봄부터 구례를 귀농지로 정하고 오르내릴 때, 아내가 전화번호 하나를 내밀었다. “아는 언니 아버지가 구례에서 이장님을 하신대. 한 번 찾아 뵈라는데?” 구례에 내려와 정착할 곳을 찾으면서도 이리 저리 기웃거리기만 했지 주민들과 변변히 말 섞어 본 적도 없고 이 언덕이 좋을까 저 골짜기가 좋을까 하면서 뜬구름만 잡고 있던 시절이었다. “들어들 와요. 우리가 요렇게 요상스럽게 사요.” 어렵지만 불쑥 찾아 뵈었을 때 좋은 인상으로 맞아 주셨다. ‘요상스럽다’는 말씀은 ‘누추하다’는 뜻이란 걸 나중에 알았다. 말씀 나누고 서울로 출발하는데 배웅해주시며 “아이고, 힘들어서 어찌 서울꺼정 올라 갈꺼나. 시나브로 가소.” 나는 ‘시나브로’라는 시어(詩語)를 실제 대화에서 쓰는 분을 그때 처음 뵀다. 이후로 두 분은 우리 가족에게 천군만마다.

“땅이 하나 나왔는디, 내려오실 수 있겄소?” 거의 매주 아버님 전화를 받았고, 즉시 내려가서 살펴보곤 했다. 구례에서 태어나 구례에서 사셨으니 구례 어디건 잘 아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니 꼭 그렇지는 않았다. 물론 거주하는 면 단위 지역은 손금 보듯 잘 아시지만 멀리 떨어진 지역은 30년 만에 와 보신다는 곳도 있었다. 그런 곳까지 알아보고 연락을 주셨던 거다. 직접 같이 다니시면서 “내가 저 위 사림마을 이장입니다만...”하고 앞장서셨고, 덕분에 알맞은 농지를 구할 수 있었다. 땅만 정했지 집을 못 찾고 있을 때, “우리 동네보다 좋은 곳도 많겠지만…” 하시면서 마을 빈 집도 찾아주신 분이다.

이후에도 면장이나 군 공무원 등 만나는 사람마다 “이분이 서울에서 공직생활 하다 내려오셨고” 하며 나를 인사시키셨고, “아버님 공직생활은 아니구요”라고 번번이 말씀을 드려도 소개 멘트는 변하지 않았다. 아내에게 들으니 어머님도 마을회관에서 “이번에 내려온 사람들 서울에서 배울 만치 배우고 내려왔고, 좋은 사람들이니까 쉰 소리덜 말고 조심스럽게 대해 주씨요”하며 요즘 말로 ‘쉴드’를 쳐주셨단다. 아버님의 정치공작과 어머님의 정보공작 덕에 정착과정은 비교적 순탄했던 셈이다.

이장님댁 내외분. 두 분은 가을 피아골 계곡에서 젊었을 때 솥단지 머리에 이고 닭 잡아 놀러왔던 일을 회상하며 즐거워하셨다.
이장님댁 내외분. 두 분은 가을 피아골 계곡에서 젊었을 때 솥단지 머리에 이고 닭 잡아 놀러왔던 일을 회상하며 즐거워하셨다.

이장님은 논농사, 어머님은 밭농사와 장 담그기에서 비법을 전수해 주셨다. 모내기를 하기 위해서는 모판에 씨 나락을 뿌리고 곱게 체 친 흙을 덮어 싹을 틔운 뒤 못자리에 넣어 모를 키워야 한다. 손이 많이 가고 쉽지 않은 작업이라 큰 농사 짓는 사람에게 돈을 주고 맡기기도 한다. 귀농 직전 몇 해는 그렇게 맡기셨다가 내가 내려오면서 부터는 “같이 한 번 해보겠나” 하며 다시 시작하셨고 덕분에 벼농사 ‘A to Z’를 배울 수 있었다. 새 경운기를 장만하시면서 그간 사용하던 경운기도 그냥 내주셨고, 뭐든 여쭤보면 “창고에 있은 게 갖다 써”를 남발하신다.

농사라는 게 1년이 한 라운드인지라 지난 봄에 들은 말씀을 올해 기억하기 힘들다. 감자 심고 고추 모종하다가 어머님께 처음 말씀 드리는 것처럼 여쭤보면 언제나 처음 듣는 것처럼 대답해주신다. 메주 띄우고 장 담글 때도 똑 같은 질문이 몇 년째 반복됐고 돌아오는 말씀도 항상 그대로다. “그 때 있던 돈이 누에 키우느라 받은 융자금 4만원이 전부였네. 그게 종필이 낳던 해였지.” 젊어서 고생하시던 말씀은 생생하고 감동적이다. 일반 농사에 축산, 양잠, 오이하우스를 하며 하루 한 두 시간 쪽 잠으로 버티던 시절에 대한 말씀은 몇 번을 들어도 코끝이 찡했다. 당시에는 논이 없어 쌀을 사다 먹어야 했던 어려움이 컸다고 하셨다. 그래서 열 마지기 넘는 벼농사를 짓는 지금도 수확을 마치면 논이 없는 동네 주민에게 조금씩이라도 쌀을 나눠 주신다.

“없는 살림에 자식 공부시킬 돈 빌리러 다니냐고 주위에서 욕도 많이 먹었네.” 어렵게 키운 4남매 모두 최고의 대학을 나왔고 그 중 둘은 사업으로, 다른 둘은 출판과 문학에서 일가를 이루고 있다. 놀라운 것은 자식들의 성공이 아니라 그런 자식들을 두고도 자랑 한 번 안 하시는 모습이다. 누가 안부를 물어도 “난 애들 잘 몰러. 알아서들 허겄지.” 하시는 게 전부다. 50줄 된 아들과 통화하실 때도 “아가, 밥은 묵었냐” 하시는 걸 보면 장성한 자식도 부모에게는 그저 걱정되는 아이에 불과한 듯 하다.

오봉댁어머님이 집 창고에서 주민들과 함께 숯불을 이용해 한과를 굽고 있다.
오봉댁어머님이 집 창고에서 주민들과 함께 숯불을 이용해 한과를 굽고 있다.

언젠가 장씨아저씨가 이장님에 대해 그러셨다. “박샌이 머리도 좋고 재주도 좋아. 그 집 애기들 봐. 다들 공부 잘혔잖어. 우리 애들도 수재 소리 들었지만 그 집 애기들은 천재여. 즈그 아버지 닮아 그런 겨. 근데 이상하게 돈은 못 만들어. 뭐든 너무 앞서가서 그랴.” 사실이 그렇다. 친환경농법도 아직 기술지원이나 자금 지원이 없을 때 시작하셨다가 별 성과를 보지 못했고, 축산도 시기가 안 맞아 접은 다음에 시장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도 머리 속에서 공부와 연구를 놓지 않으신다. 얼마 안 있어 팔순을 바라보시지만 못자리를 만들 때도 새로움을 추구하고, 콩 밭에 북을 주면서도 이파리 수와 흙의 높이를 고민하신다. 서예와 시조에 입상경력을 쌓으면서도 컴퓨터 프로그램에 대한 질문을 쏟아내 나를 난처하게 하시기도 한다. 과연 내 나이가 이장님 연세에 다다를 때 그런 모습일 수 있을까 싶다. 어머님은 편찮은 어깨 때문에 수저 들 때 손을 떠시면서도 같이 밥을 먹을 때면 “돼지고기 김치찌개 있으면 선재아빠가 생각나” 하시며 “조기라도 더 구어 주마” 덧붙이신다. 아내도 후에 그렇게 다정한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양파밭, 울금밭에 눈이 내리고 있다. 양파는 추위를 견디고 봄을 맞겠지만 울금은 바로 다음날 폭삭 주저앉고 만다.
양파밭, 울금밭에 눈이 내리고 있다. 양파는 추위를 견디고 봄을 맞겠지만 울금은 바로 다음날 폭삭 주저앉고 만다.

집에 돌아오니 아내가 시뻘건 고무장갑을 끼고 현관문을 열었다. “오늘 무 뽑기만 한다며?” 했더니 “할머니랑 내친김에 김장까지 하고 있어” 하고 웃는다. 아내는 나보다 간전댁 할머니랑 있을 때 표정이 훨씬 밝다. 동네 김장에 비하면 장난 같지만 그래도 20포기 정도 되니 재료나 과정이나 어엿한 김장이다. “김장인데 보쌈거리라도 사와야지. 아니면 굴이라도”하고 들썩거리는데 힘들다며 말렸다. “내가 이렇게 힘든데, 할머니는 나보다 더 힘들겠지?” 아내의 우문에 할머니가 현답하셨다. “워찌 안당가. 힘든가 안 힘든가 저울이 있어야 재 볼텐디.”

이래 저래 치우는 거라도 돕고 어쩌고 하니 10시가 넘었다. 쓰러지듯 자리에 누워 TV를 켜니 101살 할아버지가 농사짓는 화면이 나왔다. 할아버지의 농사 규모와 일의 양이 나보다 훨씬 크고 많은데도 유머와 웃음을 잃지 않는 모습이 놀라웠다. 같이 살며 농사짓는 70살 아들을 나무라며 농사 방법과 요령을 가르치는데 그 중 한 말씀이 훅 들어왔다. “일은 당겨서 하고 먹을 것은 미뤄서 먹는 겨!” 이거 어떡하나. 나는 정반대의 삶을 살고 있는데. 그러다 퍼뜩 생각난 게 있어 아내에게 물었다. “이장님 댁은 저녁을 4시 반이면 잡숫던데, 너무 당겨서 드시는 거 아닌가?” 아니나다를까. 아내가 쳐다보지도 않는다. 내가 생각해도 대꾸할 말은 아니다.

먹는 거야 당겨서면 어떻고 조금 미루면 또 어떤가. 구례에서 인연이 된 또 하나의 부모님, 그리고 이장님댁 두 분 스승님. 우리내외가 많이 배워서 하산 할 때까지 내내 건강하세요.

前 한국일보 기자 cameragaga@naver.com

-‘원유헌의 구례일기’ 모아보기

[구례일기34-05] 김장을 마친 오봉댁 어머니의 고무신. 혈흔처럼 묻어 있는 고춧가루 자욱이 전투를 마친 병사의 신발처럼 느껴졌다. /2015-12-04(한국일보)
[구례일기34-05] 김장을 마친 오봉댁 어머니의 고무신. 혈흔처럼 묻어 있는 고춧가루 자욱이 전투를 마친 병사의 신발처럼 느껴졌다. /2015-12-04(한국일보)
[구례일기34-02] 아직 타작을 하지 못한 콩을 덮은 비닐 위로 눈이 쌓이고 있다. 가뭄 해갈에 도움이 된다지만 속 모르고 내리는 눈이 야속하다. /2015-12-04(한국일보)
[구례일기34-02] 아직 타작을 하지 못한 콩을 덮은 비닐 위로 눈이 쌓이고 있다. 가뭄 해갈에 도움이 된다지만 속 모르고 내리는 눈이 야속하다. /2015-12-04(한국일보)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