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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키운 8할은] "악당 매력에 빠지다 보니 '서울의 달'이 나왔다"

입력
2017.06.17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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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운경 한국방송작가협회 이사장은 “내 드라마에는 재벌이나 권력가, 심지어 왕도 등장하지 않는다”며 “현실을 꼬집기 위해 소시민의 이야기에 집중한다”고 말했다. 한국방송작가협회 제공
김운경 한국방송작가협회 이사장은 “내 드라마에는 재벌이나 권력가, 심지어 왕도 등장하지 않는다”며 “현실을 꼬집기 위해 소시민의 이야기에 집중한다”고 말했다. 한국방송작가협회 제공

MBC 드라마 ‘서울의 달’(1994)은 참으로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지금이야 내 대표작으로 꼽는 사람들이 많지만 한국 정서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망측한’ 드라마였다. ‘카바레 제비족’ 김홍식(한석규)이 주인공인 것부터가 문제였다. KBS는 난색을 표했다. KBS 드라마 ‘서울 뚝배기’(1990)를 1년 하면서 시청률과 작품성으로 어느 정도 인정받았던 나였지만, ‘서울의 달’은 퇴짜를 맞았다. “지금 시대가 어느 때인데 카바레를 내세워 불륜을 조장하느냐”는 이유였다. MBC를 설득했다. 제비족 사기꾼에 꽃뱀까지 등장하니 역시 세다는 반응이었다. 그러다 김수현 작가의 ‘사랑과 야망’(1987)를 연출했던 최종수 PD가 내 손을 들어줬다. 서울 달동네를 배경으로 한 소시민의 이야기에 흥미를 느낀 듯했다.

그렇게 ‘서울의 달’은 81회를 채웠다. 원래는 50회였으나 연장방송을 31회나 했다. 지금에 와서야 말이지만 최근 케이블채널에서 재방송하는 걸 보면 힘들 게 늘려서 쓴 부분은 보질 못하겠더라. 좋은 결과로 끝났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많은 비판도 뒤따랐을 거다.

일단 평소에 보던 드라마 주인공이 아니었다. 직업도 직업이지만 성격이나 성향 자체가 건전하지 않았다. 홍식은 카바레에 온 아줌마들을 상대로 사기꾼이 되고, 심지어 시골에서 올라온 친구 춘섭(최민식)에게도 사기를 친다. 솔직히 말하면 악역이었다.

KBS ‘파랑새는 있다’(1997), MBC ‘짝패(2011), JTBC ‘유나의 거리’(2014)에 나오는 주인공도 ‘불량 과’에 속한다. 창녀와 차력사(‘파랑새는 있다’), 남의 물건을 훔치며 사는 거지(‘짝패’), 소매치기 전과범(‘유나의 거리’)도 그리 유익한 캐릭터는 아니다. 하지만 그늘진 곳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진솔한 서민들을 담고 싶었다. 아마도 제롬 D. 샐린저의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1951)을 접한 뒤부터 그런 생각을 품은 게 아닌가 싶다.

김운경 작가가 집필한 MBC 드라마 '서울의 달'(1994)에 출연한 채시라(왼쪽부터) 한석규 최민식.
김운경 작가가 집필한 MBC 드라마 '서울의 달'(1994)에 출연한 채시라(왼쪽부터) 한석규 최민식.

70년대 중반 군대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고등학교 시절 학교 도서실 위원으로 활동하며 책을 좋아했던 나는 군대에서도 자료실 업무를 자청했다. 책과 늘 함께였다. ‘호밀밭의 파수꾼’의 주인공 홀든 콜필드를 만난 것도 이때다. 명문 사립고등학교에서 성적 때문에 네 번의 퇴학을 받은 콜필드는 학교와 선생님, 사회에 대한 불만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콜필드의 방황과 일탈이 남의 얘기 같지 않았다. 나를 보는 것 같아 금방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렇게 매력을 느낀 콜필드 캐릭터는 나를 솔 벨로우의 ‘오기 마치의 모험’(1953)과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1965)으로 인도했다. 건전하고 착하기보다 삐딱하고 불량한 주인공들이 스스로 성장하는 모습에 매료됐다. 그때 다짐했다. 악당들이 주인공인 작품을 꼭 한 번 써봐야겠다고. 나중에 찾아보니 내가 읽은 소설들이 죄다 ‘피카레스크 문학’(악당, 악한, 건달이 주인공인 소설)이더라. 사회에 유해한 사람을 일컫는 스페인어 ‘피카로’에서 온 말이다. 하지만 현실 사회를 비판하고 꼬집는 주제만큼은 강렬했다.

군 제대 후 뒤늦게 77년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 1기생으로 입학했다. 내 나이 스물 셋이었다. 드라마 대본은 생각지도 못한 시절이다. 주로 시나 소설을 쓰던 문학도였다. 그러나 학교를 졸업하고 피아노 외판원 등 온갖 일을 하며 생계를 꾸려 나갔다.

그러다 그 어느 해보다 뜨거웠던 80년 5월의 그날(광주 민주화 운동)을 겪으며 무슨 결심이 섰는지, 드라마 작가가 되겠다고 마음 먹었다. KBS에서 드라마 작가를 양성하기 위해 연 방송여름학교에 원서를 냈다. 원고지 10매 정도로 글을 써서 서류 심사를 통과하니, 이렇게 선발된 100명이 2주 동안 드라마를 쓰는 수업을 들었다. 이때 드라마란 무엇이고 어떻게 대본을 쓰는 것인지 처음 배웠다. 그 중 10명의 신인작가 최종 명단에 들어 ‘전설의 고향’으로 데뷔했다. KBS사극 ‘포도대장’(1981)을 오랫동안 집필하다 ‘한 지붕 세 가족’ ‘서울 뚝배기’ ‘형’ 등 우리네 못 사는 서민들의 애환을 그리기 시작했다.

내 드라마엔 재벌이나 권력가가 등장하지 않는다. ‘짝패’ 등 사극에도 왕이 없다. 철저하게 소시민에 초점을 맞췄다. 어려운 현실을 극복해내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담아내는 게 좋다. ‘파랑새는 있다’도 KBS에서 어렵사리 승낙한 작품이다. 창녀 봉미(정선경)와 차력사 병달(이상인), 사기꾼 무술인 백 관장(백윤식) 등 사회에서 낙인 찍힌 이들이 주인공이니 알만 하지 않나. 더불어 배우 캐스팅 명단에 스타가 하나도 없었다. 당연히 반대에 부딪혔다. 들은 바로는 KBS 사장이 캐스팅을 보고 놀라 시놉시스를 던졌다더라. 그래서 당시 담당 PD와 작당하고 4~6회 정도에 인기 있는 배우들이 나온다는 ‘가짜 명단’까지 만들었다. 그렇게 “오케이”가 떨어졌다.

그러나 나온다는 스타들은 나오지 않고 ‘오합지졸’이 판을 치니 KBS는 다시 좌불안석이었다.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시청자들로부터 좋은 반응이 나오면서 시청률도 올라갔다. 부정적으로만 보이던 주인공들이 시청자들에게 공감을 얻은 순간이었다. 짜릿했다.

내가 앞으로 해야 할 일도 서민들의 드라마를 만드는 것이다. 사극에도 눈을 돌리고 있다. 과거에서부터 서민들이 어떻게 이 부조리한 세상을 극복하고 살아왔는지 끊임없이 탐구해볼 작정이다. 일제강점기 독립열사들의 삶도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그간 정권 등 외압에 의해 해오지 못한 과업을 이어가고 싶다. 정부에 의한 옛날식 ‘오더 드라마’가 아니라 제대로 된 역사의 규명을 돕는 드라마 말이다.

요즘 문재인 대통령이 가야사를 언급한 것을 두고 문화계가 난리다. 제발 대통령 한 마디에 움찔움찔하지 않았으면 한다. 자신의 소신과 신념으로 몰두하는 창작자가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김운경 이사장의 구술을 1인칭 시점으로 재구성했습니다.>

정리=강은영 기자 kis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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