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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젤 불행해” 크리스마스 악몽 피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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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젤 불행해” 크리스마스 악몽 피하는 법

입력
2016.12.21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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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가장 격렬하게 행복을 고대하는 날인 크리스마스는 대체로 슬프고 외로운 악몽으로 귀결된다. 게티이미지뱅크
연중 가장 격렬하게 행복을 고대하는 날인 크리스마스는 대체로 슬프고 외로운 악몽으로 귀결된다. 게티이미지뱅크

크리스마스에 행복으로 까무러쳐 본 적이 있는가. 아마 불행으로 까무러친 적은 많을 것이다. 지난 5년간 크리스마스의 행적을 떠올려보라. 또렷이 기억나는 것은 불행이요, 그 외에는 어디에서 뭘 했는지 생각조차 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크리스마스란 그저 그런 날로 쉽사리 잊혀지는 게 본전이고, 대체로는 터무니없이 높아진 기대에 빈정만 상하는 날인 것이다.

1년 중 ‘행복강박증’이 최고조에 달하는 크리스마스 시즌이 돌아왔다. 이날만은 행복해야 한다고, 행복하지 못하면 실패한 인생이라고 세상이 강요한다. 하지만 바로 그 강요 때문에 행복하기 힘든 역설적인 날이 바로 크리스마스다. 도처에 편재하는 크리스마스의 악몽들을 모았다. 크리스마스 이브를 사흘 앞두고 잠시 스크루지 영감으로 변신해보자. 이 악몽들을 통해 행복의 의미를 새삼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크리스마스에 좋은 곳에서 좋은 것을 먹겠다는 인류 보편의 욕구를 실현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것이 크리스마스 악몽의 근원적 원인이다. 게티이미지뱅크
크리스마스에 좋은 곳에서 좋은 것을 먹겠다는 인류 보편의 욕구를 실현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것이 크리스마스 악몽의 근원적 원인이다. 게티이미지뱅크

우리를 위한 자리는 없다

직장인 고모(29)씨는 지금은 헤어진 남자친구와 홍대 앞에서 보냈던 크리스마스 이브를 잊을 수 없다. 인파로 미어터질 것이 분명한 동네에 예약도 없이 나가는 것이 내키지 않았지만, 흥에 겨운 남자친구의 기분에 맞춰주기 위해 반대하지 않은 것이 실수였다. 저녁식사를 위해 네 군데의 식당을 찾았지만, 어디에도 자리는 없었다.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시작된 식당 탐험은 부대찌개집까지 다운그레이드를 거듭했건만, 어느 곳도 마리아와 요셉에게 말구유를 내주듯 이 연인들을 위해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왜 식당을 예약하지 않았느냐”는 고씨의 힐난과 “그러는 너는 왜 안 했느냐”는 남자친구의 언쟁이 채 시작되기도 전 냉랭한 분위기로 길을 걷던 이들에게 참사가 벌어졌다. 인파에 떠밀린 고씨가 전봇대 쓰러지듯 넘어져 발목 인대가 파열된 것. 밥도 굶은 채 병원 응급실에서 보낸 크리스마스 이브로도 모자라 보름 넘게 깁스를 하고 지냈던 고씨는 곧 이어 치러진 방송사 아나운서 면접시험에 하이힐 대신 단화를 신고 들어가야 했다. 결과는 낙방. 현재 다른 사람과 교제 중인 고씨는 “그날 이후 크리스마스에 대한 특별한 기대는 접었기 때문에 남자친구는 만나지 않을 것”이라며 “그저 가족들과 안락한 곳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싶을 뿐”이라고 말했다.

특별한 날 특별한 곳에서 보내야 한다는 사회적 압박은 수요와 공급의 법칙을 극단적으로 가시화한다. 실패담이 축적될수록 마감 임박의 시점은 앞당겨지고 있어 올해 크리스마스 호텔 패키지는 이미 12월초 이브 당일은 예약이 끝났다. 제법 이름난 식당들 중 크리스마스에 임박해 빈 자리를 찾을 수 있는 곳은 이제 없으며, 공연이나 이벤트 역시 기술진보와 함께 수 초 내 예매가 끝나버리는 광클릭 기술 보유자들의 티켓 독점 시대가 됐다.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 공포스러워지는 날이 크리스마스. 집밖은 위험하다. 게티이미지뱅크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 공포스러워지는 날이 크리스마스. 집밖은 위험하다. 게티이미지뱅크

예약이 능사가 아니다

그렇다고 예약이 능사는 아니다. 직장인 김모(42)씨는 워킹타이틀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를 크리스마스 이브에 예매하는 데 성공했지만, 최악의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당시 업무가 너무 바쁠 때라 선물도 미처 준비하지 못한 채 약속시간에 늦어버린 김씨는 빈손을 바라보는 여자친구에게 엉겁결에 “선물을 깜빡 집에 놔두고 왔다”고 거짓말을 해버렸다. 연인의 어두워진 낯빛으로도 이미 가시방석인데, 교통체증마저 지옥 같았다. 영화는 이미 시작했고, 주차장에는 주차할 자리도 없는데, 몇 바퀴나 빙글빙글 돈 후에 찾은 한 자리를 두고 다른 차의 커플과 시비까지 붙었다.

분노를 가까스로 진정시키고 들어간 극장은 너무 캄캄해 자리를 찾기 힘들었다. 한 자리씩 비어 있는 곳에 따로 앉아 각자 본 영화는 웃길 때도 슬펐고, 슬플 때는 더 슬펐다. 영화가 끝난 후 눈물로 범벅이 된 연인에게 말 한 마디 붙이지 못한 채 주차장으로 돌아온 김씨는 경악했다. 자동차 보닛이 날카로운 무언가로 잔뜩 긁혀져 있었던 것. 자리 시비가 붙었던 운전자로 추정되는 범인을 찾아낼 기운조차 나지 않았다. 이튿날 수리점에 자동차를 맡긴 김씨는 여자친구와 일주일 넘게 연락하지 않았다.

크리스마스를 가족과 함께 보내는 서구와 달리 한국사회에서 이 날은 연인들을 위한 날이다. 그래서 크리스마스의 행복을 가르는 척도는 솔로냐 커플이냐로 단순하게 구분돼 왔다. 연인 없는 사람들이 대거 짝을 찾아 나서는 솔로대첩 같은 이벤트가 열리는 이유다. 하지만 크리스마스의 악몽은 솔로보다는 연인들을 주로 강타한다. 축적된 불만과 섭섭함을 자극하며 이별의 모멘텀을 제공해주는 것이 바로 크리스마스다. 그날 차가 막히지 않았더라도 선물을 준비하지 못한 김씨는 이미 용서받기 힘든 죄를 저지른 것이다. 김씨는 “크리스마스 같은 특별한 날이 되면 항상 연인에게 애정을 심사 받는다는 느낌”이라며 “심사기준이 너무 엄격해 어떻게 해도 통과하기 어려운 것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고 말했다. 솔로가 연인들보다 외롭고 불행한 크리스마스를 보낸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높아진 기대와 행복에 대한 강박으로 어쩌면 연인이 더 불행하다.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은 크리스마스에 따로 떨어져 지내는 것이 좋다. 게티이미지뱅크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은 크리스마스에 따로 떨어져 지내는 것이 좋다. 게티이미지뱅크

불행하지 않으려면 SNS 차단해야

직장인 정모(41)씨는 결혼한 친구와 만나 보냈던 어느 해 크리스마스 이브를 최악의 악몽으로 기억하고 있다. 실연의 상처로 인생의 최저점을 지내던 그때, 정씨를 위로해 주겠다며 친구는 남편과 네 살 된 아이를 떼어놓고 약속장소로 나왔다. 가족과 보내라며 몇 번이나 사양했지만, 친구는 꼭 만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홀로 외로울 정씨를 배려한 친구의 순수한 마음은 그러나 가족이라는 강력한 제도의 힘을 벗어나지 못했다. 식사를 시작한 지 20분쯤 지나니 끊임없이 전화벨이 울려대기 시작했다.

대화는 자꾸 끊겼고, 급기야 친구의 남편은 아이와 함께 옆 카페에서 대기 중이라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정씨는 합석을 제안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내 세 가족의 단란한 자리에 눈치 없이 낀 처절한 이방인으로 전락했다. “친구의 선의는 의심하지 않아요. 하지만 기분은 정말 최악이었죠. 대충 파하고 돌아오는 길에 어찌나 서럽던지 혼자 훌쩍훌쩍 울었다니까요.”

행복과 불행은 한데 어우러지기 힘들다. 행복과 불행 모두 기침처럼 서로 감추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행복과 불행의 주기가 맞아떨어져야만 관계를 지속할 수 있는 거냐는 항변은 크리스마스 같은 날엔 잠시 미뤄두는 게 좋다. 외로움을 만끽하며 홀로 충일하게 보내는 크리스마스가 훨씬 행복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또한 쉽지 않다. 언제 어디서나 전 세계 사람들과 나를 비교해주는 소셜 미디어가 있기 때문이다. 비교는 불행의 근원이며, 오늘날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소셜 미디어는 근본적으로 비교의 감성에 근거해 있는 매체다. 로그인과 함께 홀로 충일함은 성냥팔이 소녀의 성냥처럼 휙 꺼져버린다.

전업주부 원모(38)씨는 지난 주말 초등 5학년인 딸아이와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러 가면서 이번 성탄 연휴 동안 핸드폰을 사용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산타 할아버지가 실은 엄마 아빠였음을 커밍아웃 한 이래 늘 원하는 선물을 함께 사곤 했기에 아이는 그동안 선물에 대해 별다른 불만이 없었다. 하지만 지난해 크리스마스에는 친구들과 실시간으로 카카오톡을 주고받으며 끊임없이 ‘○○는 뭐를 받았네’ ‘내 것보다 훨씬 좋네’ 등 비교를 해댔다. 본인이 원하는 것을 얻었음에도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만족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딸의 모습에 폭발한 원씨는 1년치의 불만과 분노를 쏟아 부으며 급기야 “너는 지금 받은 선물도 받을 자격이 없는 애”라는 말까지 하고 말았다. “가족이 함께 모여 있어도 스마트폰을 쥐고 있는 한은 따로 있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함께 살아도 함께이지 못하다는 사실이 가끔 슬프더라고요. 이번 크리스마스 연휴만큼은 스마트폰 없이 지내보려고 합니다.”

스마트폰 금지는 남녀노소 모두에게 적용돼야 하며, 이때 가장 최우선적으로 차단돼야 하는 매체는 인스타그램이다. 화려한 크리스마스 트리 아래 잔뜩 쌓여있는 에르메스와 샤넬과 구찌 박스에 ‘크리스마스에 찾아온 아이들 떼샷이에요’ 같은 문구는 이제 사회통합을 위해 과태료 부과를 고민해볼 만하다.

선물은 마음의 표현이다. 마음이라고 해서 등가교환의 원칙이 성립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게티이미지뱅크
선물은 마음의 표현이다. 마음이라고 해서 등가교환의 원칙이 성립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게티이미지뱅크

선물은 작지만 마음으로 해보세요

크리스마스의 핵심 이벤트인 선물은 드러내놓고 말은 하지 못하지만 가장 큰 불화의 원인이다. ‘산타 할아버지도 사람 차별하냐’는 꼬마들부터 ‘나는 핸드폰을 사줬는데 너는 왜 화장품 샘플을 갖다 주냐’는 불만까지 스펙트럼도 다채롭다. 인간의 속물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듯하지만, 들어보면 제 각각 구구절절한 사연이 있다. 마음이란 눈에 보이지 않기에 사람들은 선물로 그 마음을 번역한다. 등가교환의 원칙이 지켜지지 않으면 섭섭함과 서운함이 생겨나는 건 불가피하다.

직장인 김모(28)씨는 크리스마스뿐 아니라 각종 기념일을 잘 챙기는 편이다. 그런 특별한 날이 있어야 평소 표현하지 못했던 마음을 연인이나 가족들에게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해서다. 가장 마지막으로 여자친구에게 해줬던 크리스마스 선물은 영국제 향수와 입욕제였는데, 여자친구는 업무에 치여 살 때라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다. “약간 실망하긴 했는데, ‘그럴 수도 있지. 뭐 오늘만 날도 아니고’ 생각했어요. 선물은 그야말로 마음이거든요. 평소 여자친구가 저한테 잘했기 때문에 그날 하루만 가지고 등가교환을 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관계 전반을 봐야죠.” 가격의 등가교환이라기보다는 마음의 등가교환이어야 한다는 얘기다.

반면 취업준비생 민모(26)씨는 옛 남자친구에게 값비싼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고도 불쾌했던 경험이 있다. “폴라로이드 카메라였어요. 저는 사진 찍기에 전혀 관심이 없는데, 본인 취미가 그거였거든요. 항상 같이 다니니까 저한테 선물로 주고 자기가 사용하려는 속셈이었죠. 저는 명의만 빌려준 셈이고 사실상 남자친구 자신을 위한 셀프선물이었어요. 길에서 다시 만나도 아는 척도 하고 싶지 않네요.”

신이 인간을 위해 내어준 가장 귀한 선물(아기예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사람들은 크리스마스를 기념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그 의미가 너무 세속적이고 상업적으로 변모했다며 비판하는 사람들도 많고, 나이가 들수록 그저 12월의 무수한 날들 중 하루일 뿐이라고 여기게 된다. 영어에는 ‘크리스마스 진짜 싫어!’를 뜻하는 ‘bah humbug’라는 표현까지 있다.

하지만 아무 것도 필요 없다는 사람에게 아무것도 선물하지 않으면 역시 낙담한다. 아직은 크리스마스가 그렇게까지 아무 날도 아닌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크리스마스는 1년 중 가장 불행한 날이라는 감춰진 진실을 직면하고, 마음의 등가교환이라는 원칙에 따라 소소하지만 따스한 행복을 도모해보자. 예약이 이미 다 끝난 것은 큰 상관이 없다. 강박을 버리고 나면 행복한 크리스마스까지 아직 사흘, 겨우 사흘이 아니라 아직 사흘이나 남아 있다.

박선영 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변해림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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