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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필의 제5원소] 사드와 ‘미친 짓’

입력
2016.09.09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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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 같은 별이 안정된 형태를 유지하는 이유는 두 가지 요소가 균형을 이루기 때문이다. 하나는 핵융합에 의해 바깥으로 팽창하는 압력이고 다른 하나는 별의 중심으로 향하는 중력이다. 핵융합 반응에 필요한 연료를 다 써버리면 전자들이 서로 밀어내는 이른바 축퇴압이 중력에 맞선다. 이런 별을 흰난쟁이별이라고 한다. 좀 더 무거운 중성자별에서는 중성자들의 축퇴압이 중력과 균형을 이룬다. 이 균형이 무너져 중력이 우세해지면 블랙홀이 생긴다.

천상에서야 균형이 깨지면 블랙홀 같은 매혹적인 물건도 생기지만 사람 사는 세상에서는 균형이 미덕일 때가 많다. 20세기 과학문명이 만들어낸 가장 기이한 균형은 아마도 ‘공포의 균형’일 것이다. 만약 미국이 러시아에 전면적인 핵 공격을 하면 어떻게 될까. 핵 공격으로 모든 군사시설과 지상기지가 파괴되더라도 이를 보복할 수단이 남아 있으면 미국도 막대한 타격을 입을 것이다. 핵무기를 잔뜩 장전하고 깊은 바닷속을 은밀하게 움직이는 핵잠수함이 대표적인 보복수단에 속한다. 만약 미국이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면 섣불리 러시아에 선제 핵 공격을 하지 못할 것이다. 이는 러시아도 마찬가지이다. 즉, ‘내가 죽으면 너도 죽는다.’는 사실을 상대방이 잘 알고 있으면 핵전쟁이 나지 않는다. 이를 상호확증파괴에 의한 공포의 균형이라고 한다. 상호확증파괴는 영어로 ‘Mutually Assured Destruction’, 즉 MAD이다. 말 그대로 미친 짓이다. 지구상에서 핵무기를 다 없애면 가장 간단하면서도 확실한 것을.

냉전 시절에 이 ‘미친 짓’을 뒷받침했던 제도 중에 탄도탄요격미사일(Anti-Ballistic Missile, ABM) 협정이 있다. 탄도탄요격미사일은 자국으로 날아오는 적국의 탄도미사일을 요격할 수 있는 미사일이다. ABM 협정은 이런 요격미사일의 개발과 배치를 제한하는 협정이다. 싸울 때 싸우더라도 서로 방패나 갑옷은 착용하지 말자는 협정이다. 방패나 갑옷이 없으면 내가 선제공격을 하더라도 2차 보복공격 때문에 나도 죽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까 ABM 조약은 상호확증파괴를 더욱 확실하게 보장하는 의미가 있다.

ABM 조약을 파기한 것은 미국이었다. 2002년 당시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테러와의 전쟁을 명분으로 내세워 일방적으로 이 조약을 파기했다. 나는 방패를 들고 갑옷도 입을 테니, 당신들도 알아서 해라는 얘기다. 미국의 미사일 방어, 즉 MD(Missile Defense)가 본격화된 것도 이즈음이다. 이렇게 되면 러시아는 MD를 뚫을 새로운 무기체계를 개발하거나, 비슷한 MD 체계를 개발할 수밖에 없다. 인류를 절멸시킬 수 있는 전략무기가 줄어들기는커녕 새로운 군비경쟁이 시작될지도 모른다.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즉 사드는 적국의 탄도미사일을 높은 고도에서 요격하는 시스템이다. 사드가 방어무기체계라는 말은 맞다. 하지만 냉전 시기 핵 경쟁과 군축의 역사를 돌아보면 방패 하나 드는 것이 뭐가 문제냐고 말할 수만은 없다. 중국이나 러시아의 입장에서는 한반도 사드 배치 문제가 단지 사드 레이더로 자국이 감시당하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수백에서 수천 발의 핵무기 통제권을 갖고 있는 시진핑과 푸틴에겐 미국의 MD가 턱밑까지 파고들어 핵 균형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퍼지고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수도권도 방어하지 못하는 성주의 사드를 박근혜 대통령이 ‘북핵 방어용’이라고 아무리 강변한들 시진핑과 푸틴이 설득될 리가 없다. 이들은 한국이 이제 미국의 핵전략 운용에서 최전선의 방패 역할을 할 것이라고 여길지도 모른다. 우리 정부는 과연 이런 속내까지 다 계산하고 사드 배치를 결정한 것일까.

주먹 쓰는 사람들끼리 싸움이 나면 맨 앞의 조무래기들이 가장 먼저 다친다. 국제사회에서 지금 우리의 위치가 어디쯤인지 가늠해 볼 때마다 걱정이 앞선다.

이종필 건국대 상허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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