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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문선의 욜로 라이프] 시발비용도 우아하게... 꽃을 산다

입력
2017.03.01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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홧김에 써 버리는 푼돈을 뜻하는 ‘시발비용’. 부연하자면, “X발!”이 자동으로 튀어나오는 마음 상태를 다스리기 위해 지불하는 ‘비용’이다. ‘돈지랄’을 하거나 ‘지름신’을 영접하기엔 돈도 배짱도 없는 젊은 ‘을’들이 고작 몇 천~몇 만 원을 쓰는 행위에서 위안을 얻는다는 슬픈 이야기다. 취업 포털 인크루트의 최근 설문조사에서 성인 80%가 “화가 나서 돈을 낭비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고, 이들이 스트레스를 푸는 데 매년 쓴다는 돈은 평균 23만5,000원이었다.

시발비용은 실용성을 철저히 배제한다. 충동적으로 사 먹는 치킨과 맥주, 버스를 놔두고 굳이 잡아 타는 택시, 화장대에 몇 개가 굴러다니는데도 하나 더 사는 립스틱 등에 치르는 돈이어야 한다. 일상 탈출과 기분 전환이 시발비용의 핵심이다.

치맥, 택시비, 립스틱 대신 ‘꽃’

커피 두 잔 값, 9,900원이면 이런 꽃 한 다발을 곁에 두고 마음의 상처를 달랠 수 있다. '꽃사가' 제품.
커피 두 잔 값, 9,900원이면 이런 꽃 한 다발을 곁에 두고 마음의 상처를 달랠 수 있다. '꽃사가' 제품.

시발비용으로 꽃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 시발비용을 우아하게 쓰는 사람들이다.

회사원 정지연(32)씨는 사무실에서 꽃을 정기 구독한다. 신문, 잡지, 우유처럼 꽃을 정기적으로 배달받는 ‘플라워 섭스크립션(Flower Subscription)’ 서비스다. 정씨가 6개월 간 2주마다 꽃다발 하나씩을 받아 보는 비용은 15만원. 한 달에 2만 5,000원이다(업체마다 가격이 다르다). 정씨는 “커피 몇 잔 참고 택시 한두 번 안 타면 되는 금액”이라며 “욱할 때마다 컴퓨터 옆 꽃병에 꽂아 둔 꽃과 눈을 맞추면서 ‘나는 소중한 존재다! 다 죽었어!’라고 주문을 건다”고 말했다. “시들면 그만인 꽃을 산다는 죄책감 때문에 꽃이 주는 기쁨이 더 커지는 것 같다”고도 했다. 그야말로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ㆍ죄의식을 동반한 쾌락)’다.

꽃을 스스로 선물하는 ‘셀프 기프팅(Self-gifting) 족’이 늘면서 ‘꽃 정기 구독’ 시장은 김영란법 무풍지대로 남았다. 2014년 시장이 열린 지 3년 만에 업체가 수십 곳으로 늘었다. 1위 업체인 ‘꾸까’의 ‘정기 구독자’만 3만여명에 이른다. 꾸까 관계자는 “20~30대 여성이 많고, 최근 들어 남성 구독자도 늘고 있다”며 “꽃에 빠져서 꽃 영양제나 전문가용 가위 등 장비 욕심까지 내는 구독자도 있다”고 말했다.

얇은 주머니 사정을 감안해 꽃을 하루라도 더 싱싱하게 살려 두고 싶은 이들을 위한 팁. ① 날카로운 가위로 사선으로 잘라낸 꽃 줄기 끝 부분을 뜨거운 물에 30초간 담갔다가 꽃병에 꽂는다. 유통 과정에서 줄기에 들어간 공기가 빠져 나와 꽃이 물을 잘 빨아들이게 된다. ② 꽃병의 물은 이틀에 한 번 차가운 물로 갈아 준다. 수돗물이든 정수기물이든 상관없다. ③ 꽃을 서늘하고 그늘진 곳에 둔다. 줄기의 잎과 가시를 제거해야 물에 세균이 증식하지 않는다.(서울 웨스틴조선호텔 최수민 플로리스트)

나를 위한 소소한 사치, 꽃

졸업식, 입학식, 결혼식, 장례식, 어버이날, 스승의 날, 성년의 날… 꽃은 특정한 날에 의례적으로 주고받는 지루한 선물이었다. 시발비용으로 소비되는 꽃은 ‘내가 나에게 선물하고 온전히 즐기는 작은 사치’다.

'꽃을 담다'의 꽃차 '플라워 티 스틱(Flower Tea Stick)'. 통째로 말린 꽃 줄기 하나가 한 잔 분량이다.
'꽃을 담다'의 꽃차 '플라워 티 스틱(Flower Tea Stick)'. 통째로 말린 꽃 줄기 하나가 한 잔 분량이다.

꽃병에 꽂는 감상용 꽃이 전부가 아니다. 차(茶)로 즐기는 꽃도 있다. ‘꽃차 소믈리에 자격증’이 있을 정도로 최근 들어 국내 꽃차 시장이 커졌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입소문이 난 꽃차 브랜드 ‘꽃을 담다’. 젊은층의 꽃 소비 욕구를 읽고 20대 4명이 지난해 창업했다. 조팝나무꽃, 생강나무꽃, 쑥꽃, 국화 등 토종 꽃들을 줄기째 말리고 덖었다. 한 잔 분량이 5,000원인데도 판매 실적이 “괜찮다”고 한다.

조팝나무꽃차 한 잔을 우려 봤다. “집 앞 공원에 널린 꽃이 한 줄기에 5,000원이라니!” 본전 생각이 들었다가 “정신 건강에 좋은 시발비용이니까…” 마음을 고쳐 먹으니 5,000원이 그다지 아깝지 않았다.

지고 마는 꽃, 마시면 사라지는 꽃이 아까운 이들은 꽃무늬 물건들을 사 모은다. 촌스러움의 상징이었던 꽃이 개성과 취향을 당당하게 드러내는 표식이 됐다. 공책, 필통, 볼펜, 머리 끈, 거울, 컵, 배지, 스티커, 가방, 운동화, 티셔츠, 휴대폰 케이스… 한 권에 2,000~3,000원대인 꽃무늬 공책은 10~20대가 시발비용으로 사는 대표 물품이다. 새학기 스트레스가 치솟는 봄에 판매량이 훌쩍 뛴다고 한다. 대학원생 김민정(29)씨는 “스트레스로 뻥 터질 것 같을 때마다 인터넷 쇼핑몰에 들어가서 꽃무늬 문구를 주문한다”고 했다.

문구 브랜드 '플라잉 웨일스(Flying Whales)'의 꽃무니 공책.
문구 브랜드 '플라잉 웨일스(Flying Whales)'의 꽃무니 공책.

디자인 브랜드 ‘마리몬드’는 꽃무늬 문구에 역사적 의미까지 담았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 한 명 한 명의 이미지에 맞는 꽃을 선정해 문구를 만든다. 올봄의 꽃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집회에 매번 참석하는 김복동(91) 할머니를 닮은 백목련이다.

“우리는 꽃이 아니다!”는 여성들의 외침 속 꽃은 억압과 차별이다. 할머니 패션의 상징 무늬인 꽃은 회한과 슬픔이고, ‘중년’ 앞에 붙는 꽃은 상실과 동경이다. 나들이 하며 보는 꽃은 이 순간 아무도 부럽지 않은 행복일 터. 올봄, 당신에게 꽃은 무엇인가.

최문선 기자 moonsun@hankookilbo.com

꽃 정기배달 브랜드 '꾸까'의 스타 플라워.
꽃 정기배달 브랜드 '꾸까'의 스타 플라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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