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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석학 칼럼] 미국의 혼란한 민주주의

입력
2016.02.21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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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자유주의적 귀족이었던 알렉시 드 토크빌은 ‘개화된’ 수감제도 연구에 대한 글을 쓰겠다는 이유를 내세워 1831년 미국을 방문했다(회개하는 수도사처럼 사람을 독방에 감금하는 것이 당시 최신의 현대적 개념이었다). 이 여행에서 토크빌의 걸작인 ‘미국의 민주주의’가 나왔다. 이 책에서 그는 미국 시민의 자유에 감탄했고 유럽 구세계의 제도와 비교하며 세계 최초의 진정한 자유민주주의에 호의를 보였다.

하지만 토크빌은 심각한 의구심 또한 갖고 있었다. 다수의 독재, 미국식 삶에 숨어있는 숨막히는 지적 순응, 소수 의견이나 반대 의견의 억압은 그가 미국 민주주의에 가장 큰 위험 요소라고 여겼던 것들이다. 독재자에 의해서든 정치적 다수당에 의해서든 무제한적 권력 행사는 반드시 재앙으로 끝나게 돼 있다고 그는 확신했다.

다수결 원칙에 따라야 하는 민주주의에도 다른 모든 정치 제도처럼 제한이 필요하다. 그것이 영국에서 선거로 선출된 정치인과 귀족적 특권의 권위를 양립시켰던 이유다. 미국인들이 정부 권력 간의 견제와 균형을 위한 3권분립 원칙을 세운 헌법을 소중히 여기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와 대조적으로 프랑스의 공화제 시스템에서는 국가가 이른바 민중의 의지를 대변한다. 그 결과 정부의 권위는 덜 억압적이다. 이것이 거리 시위와 군중 폭력이 프랑스에서 많이 발생하는 이유일 것이다. 이런 시위를 통해 공권력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 비공식적으로 확인해 볼 수 있다.

토크빌은 미국 체재에서 다수결의 폭력을 제한하는 또 다른 원천이 종교의 힘이라고 여겼다. 미국에서 널리 공유되는 기독교 신앙은 극한으로 치닫고자 하는 유혹뿐만 아니라 인간의 탐욕을 완화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에서 정치적 자유는 종교적 믿음과 불가분한 관계로 얽혀 있다고 봤다.

오늘날 미국의 정치 풍경은 토크빌의 견해에 의구심을 던지는 듯 보인다. 아니 오히려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많은 공화당 후보들의 화법은 그가 1831년에 관찰한 것을 왜곡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들은 여전히 종교와 자유를 같이 붙여서 말하지만 종종 극단적 시각을 부추기기 위해 그렇게 한다. 종교적 소수집단은 맹렬한 비난을 받는다. 종말론적 공포가 확산된다. 불관용이 조장된다. 이 모든 것이 신의 이름으로 말이다.

비주류 선동가들이 주류 정치를 해치고 있는 국가가 미국뿐인 것은 물론 아니다. 종교적 선동은 서유럽보다 동유럽, 터키 그리고 이스라엘에서 더 많이 들린다. 포퓰리즘 메시지는 민주주의 세계 어느 곳에서나 비슷하다. 유럽의 난민 위기나 세계 경제의 불평등, 또 다문화주의에서 급진적 이슬람의 발호까지 모든 병폐와 불안이 자유주의적 엘리트들 탓이라는 것이다.

포퓰리즘은 많은 불안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건 주류 정치인들이 불안감의 증가를 멈출 만한 설득력 있는 방법을 점점 찾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공포 정치에 대해 걱정하는 사람들은 포퓰리즘이 민주주의 자체에 위협이라고 여기려 한다. 엘리트들에 대한 불신은 제도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고, 전문 정치인의 이기심으로부터 우리를 구해 줄 훌륭한 지도자에 대한 열망은 해로운 형태의 독재로 이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실일 수도 있다. 하지만 현 상황 자체가 사실 진정한 민주주의가 아니다. 물론 어떤 점에서는 많은 사회들이 예전보다 더 민주주의적이 됐다. 도널드 트럼프 현상은 구시대 기득권층이 대중적인 아웃사이더들에게 따돌림 당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소셜미디어는 진지한 신문이나 방송처럼 전통적인 권위의 여과 기능을 건너뛰어 어떤 견해든 직접 게재할 수 있도록 한다.

특히 미국에서는 소수 부유층이 여론을 좌지우지하는 힘을 휘두르고 있고 전통적인 질서를 전복한다. 이들 소수 부자들은 대중들에게 반엘리트주의를 선동하는데, 전통적 엘리트는 재력보다는 교육에 의해 선발되기 때문이다.

분노하는 민초들은 포퓰리즘 메시지에 휘둘리며 억만장자가 아니라 진보적 교수, 현명한 은행가 또는 회의적인 기자에게 더 큰 분노를 표출한다(그렇게 큰 분노를 불러일으킨 것은 버락 오바마의 엘리트 교육과 그의 피부색,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둘의 조합이다).

동시에 사람들은 권력에 굶주린 사기꾼에게 표를 몰아줄 힘을 더 많이 가지게 됐다. 인터넷에 나도는 조악하고 불분명한 견해에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면서, 전통적인 엘리트들은 더 이상 그런 인물들이 선출되는 것을 저지할 수 없게 됐다.

점차 사라지고 있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토크빌이 정치적 자유가 작동하도록 하는 데 필수적이라 여겼던 ‘제한’들이다. 포퓰리스트 지도자들은 점점 더 다수 유권자들에 의해 선출된다면 그와 다른 정치적ㆍ문화적 반대 의견을 짓밟아도 되는 것으로 여긴다.

토크빌의 악몽은 미국에서 아직 현실이 되진 않았다. 하지만 그 악몽은 우리가 러시아, 터키, 헝가리 그리고 아마도 폴란드에서 이미 보고 있는 것과 가깝다. 많은 문제점들에도 불구하고 항상 굳건한 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이스라엘 역시 이러한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다. 정부 장관들이 작가들, 예술가들, 그리고 기자들에게 ‘국가에 대한 충성심’의 증거를 요구하고 있다.

전통적인 엘리트들이 어떻게 권위를 되찾을 수 있을지는 알기 어렵다.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토크빌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편집자가 없다면 진지한 저널리즘은 없을 것이다. 능숙한 정치인에 의해 주도되는 정당이 없다면 쇼 비즈니스와 정치 사이의 경계는 사라질 것이다. 다수의 욕구와 편견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면 무절제가 지배할 것이다.

이는 과거에 대한 향수나 단순한 잘난 척이 아니다. 그럴 듯한 분위기의 권위를 가진 누군가를 믿어달라고 부탁하는 것 또한 아니다. 엘리트들을 향한 분노가 항상 부당한 건 아니었다. 세계화, 이민, 세계주의는 고학력 소수집단의 이익에 기여해왔다. 그리고 그 피해는 특권이 없는 사람들에게 집중됐다.

그렇다 하더라도 1830년대 토크빌이 인식한 문제는 그 어느 때보다 지금 더 의미가 있다. 자유주의적 민주주의가 인기 경쟁으로 격하돼선 안 된다. 다수결 원칙에 제약을 두는 건 소수집단의 권리를 보호하는 데 필수적이다. 그것이 인종적, 종교적 혹은 지적이든 말이다. 그러한 보호가 사라진다면 우리는 결국 민주주의가 지켜내야 하는 자유를 결국 잃게 될 것이다.

이언 부르마 미국 바드칼리지 교수

번역=고경석기자 ⓒProject Syndic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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