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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에서 몸으로… 미인의 기준이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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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에서 몸으로… 미인의 기준이 달라졌다

입력
2015.08.27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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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신혜-이영애-송혜교-김태희는

완벽한 얼굴로 미인 계보 이어

거대 스크린·TV화면 대형화와

SNS 통해 유통되는 '직찍으로'

대중들 '전신 샷'으로 시야 확대

얼굴은 밋밋해도 스타일 뚜렷한

김고은·임지연 화장품 모델 발탁

‘졸리 레이드(jolie laide)’라는 프랑스어 표현이 있다. 영어에서도 널리 쓰이는 이 말은 ‘beauty ugly’, 즉 예쁘지는 않지만 매력적인 여인을 말한다. 매부리코, 광대한 이마, 튀어나오거나 비뚤어진 입 등 미의 관습적 규범에서 일탈했으나, 자기만의 독특한 매력으로 아름답게 인식되는 여성을 일컫는다. 프랑스 여배우 샬롯 갱스부르나 미국 여배우 커스틴 던스트, 사라 제시카 파커, 줄리엣 루이스 등이 대표적이다. 외국 패션 기사를 읽다 보면 종종 만나게 되는 이 단어는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는 본격적으로 사용된 적이 없다. 한국에서 미인이란 그저 온전히 미인이어야 하므로, 논쟁 불가하고 입증과 설득의 과정이 불필요한 즉각적인 아름다움의 발현이 있어야만 한다. 미의 범주가 매우 협소하고 획일적인 사회다.

배우 김고은이 다음달 신규 론칭하는 화장품 브랜드 라비오뜨의 모델로 발탁됐다. 신생 브랜드의 도전이겠으나, 쌍꺼풀 없는 화장품 모델의 등장이라는 점만으로도 획기적인 ‘사건’이다. 회사측은 “때묻지 않은 순수한 매력과 스크린을 통해 선보인 자신감 있는 감성”을 모델 발탁의 이유로 들었다. 김고은은 아름답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그의 미모는 아름답다라는 동사의 일반적 화용론에서 벗어나 있다. 한국사회의 미의 경계가 마침내 확장되고 있는 것일까. ‘거울아, 거울아, 지금 누가 가장 예쁘지?’

전문가들이 가장 완벽한 뷰티 모델로 꼽아온 이영애(왼쪽)와 송혜교(오른쪽)는 고전적 미인의 대표적인 예. 아모레퍼시픽 제공
전문가들이 가장 완벽한 뷰티 모델로 꼽아온 이영애(왼쪽)와 송혜교(오른쪽)는 고전적 미인의 대표적인 예. 아모레퍼시픽 제공

● 얼굴에서 스타일로: 미인의 계보학

시대를 대표하는 미인의 얼굴에는 당대의 욕망과 이상이 구현돼 있다. 세기말의 여신 케이트 모스는 마약에 중독된 듯 수척한 얼굴과 멍한 눈으로 ‘헤로인 시크’의 시대를 열었고, 지젤 번천은 밝고 건강한 아름다움으로 퇴폐적 말라깽이들의 시대를 종식시켰다.

국내에서도 마찬가지다. 1980년대 컬러TV 시대의 개막과 함께 등장한 입체적 얼굴의 황신혜는 이목구비의 완벽한 비율로 컴퓨터미인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시대를 풍미했다. 지성미와 우아미로 90년대를 호령한 이영애는 어떤가. 이탈리아 베네치아를 배경으로 한 ‘마몽드’ 광고 속에서 곤돌라 추격전을 불사할 정도의 주체성을 선보인 그는 남성 못잖게 능력 있는 여성상을 제시하며 젊은 여성들의 열광적 지지를 받았다. ‘산소 같은 여자’를 카피로 내세운 이영애의 마몽드 CF는 한국 광고 캠페인 사상 가장 성공한 사례로 손꼽힌다. 해외 배낭여행과 록카페, PC통신으로 자유를 만끽하던 X세대 감성은 톡톡 튀는 당돌한 개성의 김희선을 미의 왕좌에 등극시켰고, 귀엽고 도회적인 송혜교와 서정적이고 청순한 김태희가 어떤 각도에서 봐도 흠잡을 데 없는 이목구비로 왕위를 계승했다. 이 미인들의 계보가 고스란히 한국 화장품모델의 역사와 겹친다.

그러나 황신혜-이영애-김희선-송혜교-김태희로 이어지던 한국 대표미인의 계보는 장기간 후속주자가 나오지 않으며 사실상 단절된 것처럼 보인다. 완벽한 이목구비를 가진 단 한 명의 여인이 미의 정전(正典)으로 군림하던 시대는 끝난 것일까.

CJ E&M의 김민수 캐스팅팀 과장은 “이제 미모 그 자체보다도 세련된 스타일이 더 중요해진 시대”라고 진단했다. 과거에는 ‘패완얼’(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는 말을 많이 썼지만, 이제는 ‘패완몸’(패션의 완성은 몸)이라는 말로 사실상 대체됐다는 것. “비주얼의 측면에서 패션으로 뒷받침되지 않는 미모에는 이제 대중들이 반응하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예컨대 김태희의 미모는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화가 없지만, 대중들은 이제 장윤주의 팔등신 전신샷에 더 많은 환호를 보낸다. “전신컷에서 임팩트가 없으면 아무리 얼굴이 예뻐도 어필하지 못한다. 그 임팩트를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패션이고, 스타일”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배우 고준희, 윤승아, 이성경, 김소연 등의 패션을 담당하고 있는 스타일리스트 김지혜 실장도 “예쁜 얼굴보다도 패셔너블하고 스타일리시한 이미지가 뷰티 광고에서조차 더 각광받고 있다”고 말했다. “문화가 발달하다 보니 해외여행이나 외국 드라마 등을 통해 다양한 스타일을 접하게 되고, 자기표현의 방법으로 능수능란하게 스타일을 구사할 수 있는 패셔니스타들이 획일적으로 예쁜 얼굴보다 더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것 같다”는 것이다.

미의식이 변함에 따라 캐스팅 기준도 변했다. 대중의 반응은 브랜드 협찬으로 이어지고, 협찬은 캐스팅의 중요한 조건이다. 패션채널과 드라마 등 방송에서는 김사랑과 이하늬가 섭외 1순위. 어떤 패션 아이템을 착용하고 나와도 그 다음날이면 ‘솔드아웃’시키는 이 ‘완판녀’들은 연기력으로 확실히 자리매김한 배우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캐스팅 리스트의 최상단에 이름을 올린다. 드라마는 한류스타, 영화는 티켓파워라는 중요한 캐스팅 기준이 있지만, 공효진과 김민희는 연기력을 겸비한 패셔니스타의 힘으로 러브콜을 가장 많이 받는 최상위 배우군으로 분류된다. 한 방송 관계자는 “굉장히 예쁜데 촌스러운 얼굴들이 있다. 안타깝지만 이런 친구들은 설 자리가 확실하게 줄어들었다. 패션이나 메이크업을 바꿔보라고 많이 권유하는데, 타고난 재능과 꾸준한 연구가 있어야 가능한 분야라 변화가 쉽지는 않다”고 말했다.

<'향장'의 역대 표지 모델>

(맨 위) 1980년 3월 임예진/ 1981년 1월 금보라/ 1985년 10월 황신혜 (가운뎃줄) 1992년 9월 이승연/ 1992년 12월 오현경 (맨 아래) 1997년 2월 김지호/ 2003년 8월 이혜상/ 2015년 8월 전지현. 아모레 퍼시픽 제공.
(맨 위) 1980년 3월 임예진/ 1981년 1월 금보라/ 1985년 10월 황신혜 (가운뎃줄) 1992년 9월 이승연/ 1992년 12월 오현경 (맨 아래) 1997년 2월 김지호/ 2003년 8월 이혜상/ 2015년 8월 전지현. 아모레 퍼시픽 제공.

● 권력은 몸으로 넘어갔다

그래서 스타일리스트와 포토샵이 있는 것 아닌가. 하지만 전문가들은 “잘 만들어진 화보가 더 이상 먹히지 않는 시장이 됐다”고 입을 모은다. ‘1,000만 관객’이 흔해진 영화의 거대 스크린과 TV화면의 대형화로 인해 얼굴 클로즈업에서 전신샷 조망으로 미를 가늠하는 시야 자체가 확대됐고, 인스타그램 등 SNS를 통해 유통되는 ‘직찍’(직접 찍어 보정하지 않은 리얼한 사진)과 공항패션으로 인해 ‘진짜 미모’와 전체적인 스타일을 더 중시하게 된 것이다. 24시간 가동되는 매체 환경의 변화는 잡지 화보의 작위적 아름다움보다는 직찍과 공항패션의 ‘리얼한 모습’에 폭발적으로 반응하도록 우리의 감각회로를 바꿔놓았다.

스타일이 미의 핵심 요소가 된 것은 미의 권력이 얼굴에서 몸으로 넘어간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90년대 후반 테크노댄스를 추며 광고모델로 등장한 전지현은 평범한 듯 아름다운 얼굴로 ‘골반의 아름다움’이라는 영역도 있음을 깨우쳐주며 몸의 영토를 개척했다. 이어 열린 걸그룹의 시대는 우리로 하여금 여성의 몸을 본격적이고도 구체적으로 응시하도록 만들었다. 신체 특정 부위의 우월함으로 미인의 반열에 성큼 올라선 걸그룹 멤버들은 많다. ‘꿀벅지’ 유이, ‘베이글녀’ 전효성, ‘애플힙’ 설현…. 특히 설현은 엉덩이를 부각시킨 SK텔레콤 광고 시트지가 매장에서 대거 도난 당하는 사례로 최근 화제가 됐을 정도. 김민수 CJ E&M 캐스팅팀 과장은 “대중들이 몸에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된 데는 걸그룹의 영향이 정말 크다”며 “신체를 통해 드러내는 자신감 있는 스타일이 미의 중요한 기준이 됐다”고 말했다. “이제 (애니메이션 캐릭터) 캔디보다는 엘사가 먹히는 시대”라는 분석이다.

스타일리스트 김지혜 실장도 “청바지에 티셔츠만 입어도 스타일리시하다는 인상을 주려면 빼어난 몸매가 필수”라며 “운동과 패션을 통해 자신을 가꿀 줄 아는 사람의 세련된 감각 자체가 따라하고 싶은 라이프스타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고전적 미의 기준에서 봤을 때, 이 새로운 미인들의 얼굴은 다소 밋밋하다고 할 수 있다. 오랜 시간을 두고 인지되는 아름다움이다. 또렷한 인상으로 강렬한 아름다움을 남기기보다는 자유롭게 스타일을 변주할 수 있는 이점이 이 얼굴들에는 있다. 김고은에 앞서 영화 ‘인간중독’으로 데뷔한 배우 임지연이 지난해 아모레퍼시픽 한율의 모델로 기용됐다. 몸의 아름다움이 형성한 풍부한 맥락을 배면에 깔고 클로즈업된 이 얼굴들은 미의 독재에 맞선 민주적 권력분립인 걸까. 아니면, 욕망의 수용체로서의 몸에 탐닉하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말초적 물신주의인 걸까. 어느 쪽이든, 우리가 몸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박선영기자 aureoi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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