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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당신들은 거버넌스를 모른다”

입력
2017.09.05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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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과학기술계에서는 박기영 교수에 이어 창조과학을 신봉하고 왜곡된 역사관을 피력해 온 박성진 교수의 내각 등용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높다. 나는 주로 페이스북으로 해당 사안에 대한 전문가들의 의견을 접한다. 아는 과학자 분들과 이야기가 오가다 ‘과학기술 거버넌스’라는 표현을 썼더니, 핀잔 섞인 댓글이 달렸다. ‘행정’이라고 해도 될 말을 왜 영어인 ‘거버넌스’라고 썼느냐는 것이다. 사실 거기엔 이유가 있다.

2000년대 후반, 난 영국의 한 연구소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다. 줄기세포, 뇌 연구 등 첨단 생명공학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연구하는 곳이었다. 연구소 소장이 해당 분야에서 저명한 영국인 교수였는데, 한번은 EU 사무국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그를 따라 중국을 방문했다. 중국의 생명윤리 거버넌스에 대해 발표하고 토론하는 컨퍼런스였다. 국제 컨퍼런스는 시종일관 ‘민주적이고 윤리적인’ 서구 사람들이 ‘권위주의적이고 비윤리적인’ 중국과 아시아 연구자들을 훈계하는 분위기로 진행됐다. 한 유럽 발표자는 정부의 충분한 의료재정 지원이 없어 질병에 시달리는 중국 아이들의 현황을 묘사하면서 “첨단의학 연구를 하려 들게 아니라 불쌍한 애들한테 줄 의약품에나 돈을 쓰라!”고 일갈했다. 그 자체가 틀린 말은 아니었겠지만, ‘중국인 너희들 따위가…’라는 속내가 읽혔다.

우리 연구소장도 중요한 발표자였다. 그는 프레젠테이션 화면에 온갖 중국어 단어를 나열했다. ‘행정’, ‘통치’, ‘관리’, ‘지배’, ‘정부’ 등… 그는 딱 잘라 말했다. “중국 역사에는 영어 ‘거버넌스’(governance)에 비견될 만한 단어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지배자가 신민을 짓누르는 통치의 경험과 시스템만 있을 뿐, 개인이 자유로운 의지로 스스로를 규율하고 관리하여 한결 더 높은 단계의 인간주체와 사회를 형성한 경험이 일천하다는 것이 주장의 요지였다. 다시 말해, 아시아인들은 외부의 특별한 관리를 필요로 했다. 한창 회의가 진행되고 있을 때, 중국인 과학자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우리 성장(省長ㆍgovernor)께서 오셨다”고 알리는 말이 영어로 들렸다. 중국에서는 한 지방의 행정수장이 왕처럼 대단한 존재이고, 과학자들이 그 앞에 굽실거리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보무도 당당한 그가 만면에 웃음을 띠며 영국인 연구소장 앞으로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그 순간 아연실색할 일이 벌어졌다. 우리 교수가 순간적으로 성장의 악수를 뿌리치며 눈길도 안 마주치고 ‘생깠다’. 수백명의 중국 과학자들 앞에서, ‘이 사람이 너희에겐 대단한 상전이겠지만 나한텐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시위하는 듯했다. 한껏 경멸감을 담아.

지금까지도, 난 그때의 장면을 두고두고 곱씹는다. 회상하면 할수록, 그 영국 교수가 ‘싸가지’가 없었다. 그런데 왜 그때 중국 과학자들은 그의 오만방자한 행동 앞에 정당하게 분노하지 못했을까? 실제 그들 사이에서 영어 의미의 ‘거버넌스’가 부재했기 때문이다. 사설이 길었지만, ‘거버넌스’는 ‘행정’이 아니다. 한국으로 돌아온 직후, 각종 보고서와 발표에서 ‘협치’라는 말을 만들어 썼다. 의외로 그 말이 널리 통용되었다. 정작 난 요즘 그 단어의 사용을 꺼린다. 여전히 그 번역에는 중요한 요소가 빠져 있다. 굳이 풀어 해석하자면, ‘거버넌스’는 ‘자발적 자기규율의 가치 시스템’에 가깝다. 무엇이 그것을 가능케 할까? 이 사회에 제대로 발을 딛고 서 있는 개인이다. 정치인이나 관료한테 굽실대면서 멸시를 자초하는 신민이 아닌, 방법론적 회의를 통해 과학적으로 사고하고, 사회적 문제를 고민하며, 역사적 가치 판단 앞에 당당한 개인! 이제 우리 스스로를 제대로 ‘거번’(govern) 했으면 좋겠다.

김도훈 아르스 프락시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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