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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 언제까지 방치해야 하나?

입력
2016.11.15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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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17만~20만 건 불법 시술… 낙태 금지하면 사회 혼란

낙태를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있지만 매년 17만~20만 건의 불법 낙태수술이 이뤄지고 있어 사회적 합의를 통해 낙태 관련 법 개정이 절실한 실정이다. 게티이미지뱅크
낙태를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있지만 매년 17만~20만 건의 불법 낙태수술이 이뤄지고 있어 사회적 합의를 통해 낙태 관련 법 개정이 절실한 실정이다. 게티이미지뱅크

“여보, 큰일 났어. 셋째를 임신했어.” 두 아이 엄마인 L(43)씨는 ‘원치 않는 임신’을 했다. 내년이면 남편이 쉰 살이고, 큰 딸은 중학생이다. 남편 벌이가 시원치 않아 맞벌이하는 L씨에게 갑작스러운 임신은 축복은커녕 고통 그 자체다. 일주일 동안 밤새 고민한 끝에 L씨는 결국 낙태하기로 했다. 불법인 줄 알지만 동네 산부인과의원을 찾았다. 다행히 낙태수술을 할 수 있었다. 낙태수술 후 L씨는 남편 손을 붙잡고 눈물을 흘렸다.“아이가 너무 불쌍하다. 여유만 있었으면 이런 일을 하지 않았을 텐데. 평생 가슴이 아플 것 같아.”

매년 17만~20만 건 불법 낙태수술

지난 11일 백지화됐지만 보건복지부는 지난 9월 불법 임신중절수술(낙태)을 비롯해 8개 비도덕적 진료행위를 최대 자격정지 12개월이 가능하도록 하는 ‘의료인 면허제도 개선방안’을 발표해 산부인과 의사들이 거세게 반발하면서 논란을 빚었다.

낙태는 형법(제269조, 제270조)으로 금지돼 있지만 모자보건법에는 일정 요건을 충족하면 허용하고 있다. 현실적으로는 수많은 이유로 불법 낙태가 횡행하고 있다.

이로 인해 법조계와 의료계에서는 사실상 사문화된 낙태죄와 지나치게 엄격한 모자보건법을 개정하기 위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복지부가 실시한‘전국 인공임신중절수술 변동실태’조사결과, 2010년에만 낙태가 16만8,739건이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가운데 기혼 여성(9만6,000여 건), 미혼 여성(7만2,000여 건)보다 더 많이 불법 낙태를 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연령별로는 25~34세가 가장 많았다. 이 연령대에서도 기혼자(33.3%)가 미혼자(17.4%)보다 더 많이 낙태했다. 산부인과 전문의들은 “매년 불법 낙태수술이 17만~20만 건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며 “간혹 낙태죄로 재판을 받지만 대부분 낙태로 인해 여성이 다치거나 사망했을 때에 국한된다”고 했다. 김동석 직선제 산부인과의사회 회장은 “낙태수술을 한 의사와 여성에 대한 처벌 강화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며 “여성인권도 제한하고 낙태수술을 음성화해 더 큰 사회문제가 될 수 있다”고 했다.

가톨릭교회 등 낙태 금지 측은 “임신중절을 하지 않고서는 임신부 생명을 구하기 어려울 때에 낙태를 정당화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의도하지 않게 낙태하는 것을 ‘간접 유산’이라 한다. 자궁암 치료를 위해 자궁을 잘라냈을 때 등이 이에 속한다. 반대로 임신성 고혈압 등 임신 관련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부득이 낙태하는 것을 ‘치료적 유산’이라 한다. 여기에 가족계획정책 등 사회ㆍ경제적 이유로 낙태하는 것을‘편의적 유산’이라 한다. 전과 달리 사회ㆍ경제적 이유로 치료ㆍ편의적 유산이 늘고 있지만 사회적 논의는 아직 이뤄지지 않고 있다.

“40년 된 낡은 모자보건법 개정을”

산부인과 의사들은 1973년 만든 모자보건법 개정을 주장한다. 40년을 넘긴 낡은 모자보건법을 손보지 않고는 불법 낙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우선 ‘임신 24주 내 인공 임신중절수술이 가능하다’는 조항을 고치자고 했다. 이들은 “의학발전으로 22~24주 출생한 미숙아가 생존했다는 보고가 잇따르고 있다”며 “24주 내로 낙태를 허용한 것은 생존 가능한 아이의 치료기회를 박탈하는 것”이라고 했다.

‘우생ㆍ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이 있으면 낙태 가능하다’는 조항도 문제다. 김 회장은 “이 조항으로 과거 수많은 한센병 환자가 강제로 낙태해야만 했다”며 “정신장애가 유전되지 않으므로 환자 인권 보장 차원에서라도 이 조항을 없애야 한다”고 말했다.

풍진ㆍ톡소플라즈마증 등 감염질환이 있을 때 낙태를 허용하는 것도 문제라는 지적이다. 임신 중 감염질환에 걸려도 태아에게 영향을 크게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산부인과의사회 관계자는 “태아 발달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대표적 감염질환인 풍진도 임신 18주 이후에 감염되면 태아 결손이 생길 가능성은 0%에 가깝다”며 “임신부나 배우자가 감염질환에 걸리면 무조건 낙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문제”라고 했다.

미혼 여성보다 기혼 여성 낙태가 많은 현실과 여성인권도 고려해 모자보건법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조윤미 녹색소비자연합 공동대표는 “임신하면 여성 인생 전반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며 “인권 차원에서라도 원치 않는 임신을 중단할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고 했다.

비록 사회적 반대의 벽에 부딪혀 논란 끝에 폐기했지만 낙태 처벌을 강화해 출산율을 끌어올리겠다는 보건당국의 얄팍한 인식도 개선해야 한다. 한 산부인과 전문의는 “폭력배 소탕하듯 산부인과 의사를 처벌하려는 보건당국자들의 인식부터 바꿔야 할 것”이라고 했다.

김치중 의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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