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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김소월 한용운... 초판본 시집 열풍이 불편한 이유

입력
2016.03.27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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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와다리’에서 출간된 김소월 시집 ‘진달래꽃’.
‘소와다리’에서 출간된 김소월 시집 ‘진달래꽃’.

서점 베스트셀러 코너에 ‘책 아닌 책’들이 등장한 게 언제부터일까. 재작년 ‘힐링’이란 단어를 업고 나온 컬러링북, 그 뒤를 이은 필사책. 이런 책들은 책이면서 책이 아니다. 외관상 책이지만 독서 행위를 일으키지 않는, 책을 샀다는 만족감은 주지만 인식의 지평이 찢어져 확대되는 통증은 수반하지 않는. 그 기원을 좇다 보면 서점 한 켠의 문구 코너에 이르게 된다. 책의 자장 안에 있으면서도 책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들은 노트, 필기구, 책갈피와 더 가깝다.

한동안 잠잠하던 ‘문구형 도서’의 차세대 주자가 등장했다. 요즘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초판본 시집이다. 최근 온라인서점 알라딘의 시 부문 베스트셀러 저자들을 보면 1위 윤동주, 2위 백석, 3위 정지용, 4위 김소월, 5위 한용운이다. 시계(詩計)가 갑자기 100년 전으로 회귀한 데는 1인 출판사 ‘소와다리’의 힘이 컸다. 지난해 11월 출간된 김소월 시집 ‘진달래꽃’의 초판 복각본은 10만부가 팔렸고, 2월에 나온 윤동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1955년 증보판을 복원한 시집은 15만부를 돌파했다. 다른 출판사도 이 열풍에 동참하며 바야흐로 근대 시인 전성기가 열렸다.

이 시집들을 문구로 분류하는 이유는 읽기 보다 소장의 목적이 강하기 때문이다. 한자, 세로쓰기, 열악한 인쇄 상태 등 초판본을 그대로 복원하느라 책들은 당연히 가독성이 좋지 않다. 내용은 이미 교과서에서 본 것들이라 굳이 다시 볼 필요가 없다. 여기에 격동의 근현대사를 떠올리게 하는 낡고 고풍스러운 표지까지. 여러모로 책장에 꽂아두기 딱 좋은 복고풍 팬시용품이다. 문학 전문 출판사에 근무하는 한 시인은 복간본 시집에 대해 “책을 읽긴 해야겠는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를 때, 어려운 텍스트에 도전하는 건 부담스러울 때 쉽게 할 수 있는 선택”이라고 말했다. 짧은 텍스트와 저렴한 가격, 예쁜 표지, 익숙한 내용이 부담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힘 들일 일 없는, 한 마디로 “안일한 독서”다.

인터넷 교보문고의 김소월 ‘진달래꽃’(더스토리 출판사) 판매 페이지. 복각본이란 말은 없고 초판본이란 말만 있다.
인터넷 교보문고의 김소월 ‘진달래꽃’(더스토리 출판사) 판매 페이지. 복각본이란 말은 없고 초판본이란 말만 있다.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하나 더 있다. ‘초판본’을 앞세운 대부분의 시집이 사실은 초판 복각본, 즉 초판의 표지와 내지 디자인을 복제한 것이지만 표지엔 그냥 초판본이라고 쓰거나 복각본임을 명기하지 않고 있다. 경매에서 몇 백만 원에 팔리는 진짜 초판본이 서점에서 다량으로 판매될 거라 생각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복각이란 단어를 짐짓 감추는 것도 그냥 넘어갈 수 없는 행태다. 더스토리 출판사는 인터넷에서 “더스토리에서 오랜 시간 소중히 간직해 온 초판본 도서를 공개합니다”며 흰 장갑을 낀 손이 낡은 책들을 뒤적이는 사진과 함께 책을 홍보하고 있다. 진짜 초판본으로 오인할 소지가 다분하다. 이런 경우 마땅히 제재할 법규도 없다.

얼마 전 OECD 회원국 가운데 한국이 독서율 꼴찌라는 보도가 있었다. 독서율 감소를 전하는 뉴스는, 독서가 인간을 향상시킬 거란 근거 없는 믿음, 국민이 향상된 역량으로 국격을 높여야 한다는 고압적 자세 때문에 짜증스럽지만, 무엇보다 아무 책이나 읽기만 하라는 무성의한 태도 때문에 더욱 그렇다. 책 자체는 아무것도 보장하지 않는다. 당연한 말이지만 무엇을 읽고 어떤 생각을 하느냐다.

황수현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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