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최문선 기자

등록 : 2017.07.05 04:40

[겨를] "피아노는 삶이자 구원" 아재의 세레나데

'피아노 치는 남자' 김상봉 전남대 교수와 김용연 금호아시아나 부사장

등록 : 2017.07.05 04:40

게티이미지뱅크

피아노는 당신에게 무엇인가. 지긋지긋한 사교육, 사랑을 고백한 순간, 경건한 찬송가, 영화속 그 장면, 가슴 뛰는 웨딩 마치… 누군가에게는 일생의 꿈이다.

마라톤 풀코스 완주를 마음에 품은 이가 성실하게 근육을 단련하듯, 그들은 매일 피아노를 친다. 김상봉(57) 전남대 철학과 교수와 김용연(65) 금호아시아나재단 부사장. 난곡을 쳐내는 것도, 독주회를 여는 것도, 콩쿠르에 나가는 것도 목표가 아니다. 피아노 앞에 앉는 순간이 순정한 기쁨이며,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두 사람. “피아노는 죽음 앞의 구원이다”(김상봉 교수), “피아노는 내 삶 자체다”(김용연 부사장).

그들이 별종이어서가 아니다. 콘돌리자 라이스 전 미국 국무부 장관, 헬무트 슈미트 전 독일 총리, 에후드 바라크 전 이스라엘 총리, 해리 트루먼 전 미국 대통령. 세계를 쥐락펴락한 거물들도 피아노에 빠졌다. 피아노가 대체 무엇이기에.

김상봉 교수 “피아노는 구원”

피아노와 사랑에 빠진 김상봉 전남대 철학과 교수가 3일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 산방도서관 강당에서 피아노를 치고 있다. 그는 올 7,8월 산방도서관에서 인문학강의를 한다. 김상봉 교수 제공

대책 없이 사랑에 빠진 사람을 찾는다면, 김상봉 교수를 만나면 된다. 그의 사랑은 피아노다. 모짜르트 소나타 545번, 베토벤 소나타 8번, 바하 평균율 피아노곡집 1번, 쇼팽 왈츠 7번. “피아노 치는 얘기를 기사로 쓰고 싶다”는 한 마디에 김 교수가 전화로 연달아 들려준 곡이다. 매끄러운 연주에 김 교수의 열정과 몰입이 실려 왔다. 김 교수와 생면부지인 기자는 스마트폰에 대고 박수를 쳤다.

김 교수는 자칭 피아노 중독자다. 손가락을 과하게 써서 힘줄에 염증이 생기는 방아쇠 수지(건초염)를 앓을 정도다. “피아노는 도저히 줄일 수 없어서 컴퓨터 자판을 덜 치고 있어요(웃음).” 그는 방학마다 머무는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셋집에서 요즘 매일 3시간씩 피아노를 친다. 서울과 광주 집에도 피아노를 들여 놨다. 세 대 모두 낡은 업라이트 피아노다.

김 교수는 전남대에 늦깎이 임용된 이듬해인 2006년 피아노 앞에 처음 앉았다. 105만 원짜리 중고 피아노를 구하고 초등학교 아이들과 함께 피아노 학원을 1년쯤 다녔다. “전투하듯 살아낸 삶에 그제서야 나를 챙길 여유가 생긴 거죠. 음악을 워낙 좋아했고 철학자로서 미학과 예술철학을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현학적 호기심도 컸어요. 베토벤 머리 속엔 뭐가 들어 있었기에 그런 명곡을 쓴 건지 발견하고 싶었고요.”

‘40대 후반 아저씨’의 뻣뻣한 손가락은 말을 듣지 않았다. “20살 넘어서 건반 악기를 배우는 건 이론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고 해요. 피아노를 끔찍하게 좋아하지 않았다면 저도 포기했을 거예요. 바빠서 레슨을 꾸준히 받지는 못했어요. 어쩌다 만나는 피아니스트에게 젖 동냥 하듯 조금씩 조언을 들었죠.” 성실한 연습이 차곡차곡 쌓여 김 교수가 ‘연주 같은 연주’를 하게 된 건 1년쯤 전부터라고 한다. “10년은 그야말로 수모의 세월이었어요. 소음 공해니까 제발 그만 치라는 얘기를 수없이 들었죠(웃음). 그래도 서두르지 않았어요. 남에게 보여주려고 치는 피아노가 아니었으니까요.”

방학마다 머무는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셋집에서 낡은 피아노를 치는 김상봉 교수. 김상봉 교수 제공

김 교수에게 피아노는 무엇일까. 달변으로 널리 알려진 그는 유독 이 질문에 쉽게 답하지 못했다. “정말 소중한 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건데…” 그의 피아노 사랑이 그만큼 지독하고도 맹목적이라는 뜻일 터. ‘홀로 있는 시간을 위한 완벽한 친구이자 나를 위한 배려.’ 한참 뜸을 들이던 김 교수가 정리한 피아노의 의미다. “사람이 늙어 가는 건 고독해지는 거예요. 기력이 쇠하고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지죠. 그때 피아노가 내 공간을 충만함으로 채워줄 겁니다. 저의 노후대책은 피아노예요(웃음).”

클래식파인 김 교수는 요즘 노래 반주 연습에도 공을 들이고 있다. “혼자 치는 피아노는 물론 좋지만 함께 하는 연주도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피아노를 매개로 어울려 노는 거죠. 골프 치고 소주 마시는 거? 그거 노는 거 아니에요. 예술 말고는 다 부질 없다는 걸 세월이 흐르면 알게 될 거예요. 피아노가 이렇게 좋은데 왜 안 치세요?”

김용연 부사장 “피아노는 삶”

김용연 금호아시아나재단 부사장이 서울 종로구 새문안로 문호아트홀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다. 류효진 기자

김용연 부사장이 서울 광화문 문호아트홀 콘서트홀의 스타인웨이 그랜드 피아노로 에릭 클랩턴의 ‘티어스 인 헤븐(Tears in heaven)’과 영화 ‘밤 안개 속의 데이트’의 주제곡 ‘라 플라야(La playa)’를 들려줬다. 완벽하게 매끈한 연주는 아니었지만, 그의 표정은 더 없이 진지하고도 풍성했다. 피아노 건반에 손을 올린 몇 분 동안 ‘나만의 공간’으로 빠져 드는 게 눈에 보였다. 김상봉 교수가 집요하고 착실한 피아니스트라면, 김 부사장은 용감하고 자유로운 피아니스트다. 그는 집에는 그랜드 피아노를, 사무실엔 업라이트 피아노를 두고 틈틈이 친다. 평일엔 점심시간을 아껴 피아노 앞에 앉는다. 재단 직원들은 ‘김용연의 런치 콘서트’라고 부른다. “피아노는 처절하게 살아 온 삶의 보상이자 아픔을 해소하는 창구입니다. 골프, 술, 해외 여행이 주는 위로는 한계가 있어요.”

피아노는 김 부사장의 평생 친구다. 17살부터 50년 가까이 피아노를 쳤다. 그는 피아노를 독학했다. 레슨은 한 번도 받지 않았다. “음악에 소질이 있었어요. 기타는 치자 마자 신동이라고 불릴 정도였죠. 어느 날 부산 집에 있는 피아노가 눈에 들어오기에 덤비듯 치기 시작했어요. 팝송 악보를 구해서 건반도 페달도 마음대로 눌렀어요. 그런데도 경양식 레스토랑에서 피아노 연주 아르바이트를 할 정도의 실력은 됐어요.”

김 부사장은 ‘바이엘’ ‘하농’ ‘체르니’ 같은 피아노 교본을 익힌 적도, 클래식을 배운 적도 없다. 시도한 클래식은 쇼팽의 야상곡과 슈베르트의 세레나데 정도다. “조율 같은 건 아예 몰라요. 소리가 엉망인 피아노를 치면서도 혼자 눈물을 줄줄 흘릴 수 있어요. ‘필(Feel)’을 제법 잘 표현하고 느끼니까요. 요즘은 유튜브 동영상을 보고 따라 쳐요.” 아시아나항공 기내 서비스 담당이었던 그가 문화재단 임원으로 발탁된 건 그런 문화 감수성 덕분이었다.

“피아노가 당신을 위한 악기이지, 악기를 위한 당신이 아니다.” 프랑스 피아니스트 장 에푸랑 바부제가 얼마 전 김 부사장에게 들려준 말이다. “이제라도 기본기를 뜯어고쳐야 할지 고민이라고 했더니, 왜 피아노를 치느냐고 묻더군요. ‘혼자 즐기는 것이다(Enjoy by myself)’고 했죠. 그렇다면 무리하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문호아트홀 그랜드 피아노를 쓰다듬는 김용연 부사장.

김 부사장은 “피아노를 배우려면 그래도 기초부터 배우라”고 조언했다. “제 실력이 피아니스트를 흉내 내는 정도라는 걸 잘 알아요. 그걸 넘어서는 표현을 하고 싶어서 종종 아쉽죠. 레슨을 받기엔 늦었고요. 피아노를 컴퓨터처럼 치는 게 정답이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세계적 콩쿠르에 나가서 1등 하는 인재를 키우는 게 우리 재단의 최종 목표도 아니고요. 음악이 우리 삶의 일부가 되기를 바라요.”

즐기는 피아니스트로서 김 부사장의 목표는 무엇일까. “끝내 명곡을 칠 순 없을 거예요. 프랑스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에릭 사티라고 있어요. 강아지를 데리고 다니면서 동네 와인 바에서 피아노를 연주했어요. 피아노가 삶에 스민 거죠. 저도 그런 연주자가 되고 싶어요.”

최문선 기자 moonsun@hankookilbo.com 김도엽(경희대 정치외교학 3)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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