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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 많이 보면 실력 는다고? 딱 보고 착 푸는 기술만 늘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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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 많이 보면 실력 는다고? 딱 보고 착 푸는 기술만 늘 뿐

입력
2017.05.26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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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부총리로 지명된 김동연 아주대학교 총장. 불우했던 어린 시절 때문에 ‘개천에서 난 용’의 전형적 사례로 꼽힌다. 개인적 분투야 칭송받을 일이지만, 그렇다고 모두에게 용이 될 것을 요구하는 건 또 다른 폭력이 아닐까. 뉴시스
경제부총리로 지명된 김동연 아주대학교 총장. 불우했던 어린 시절 때문에 ‘개천에서 난 용’의 전형적 사례로 꼽힌다. 개인적 분투야 칭송받을 일이지만, 그렇다고 모두에게 용이 될 것을 요구하는 건 또 다른 폭력이 아닐까. 뉴시스

‘시험’은 어제 끝난 국가대표 축구경기와 같다. 모두가 선수인 양, 감독인 양, 해설자인 양 한마디씩은 다 보탤 수 있는 주제다. 학창시절 지긋지긋하게 치렀으니 말이다. 그런데 시험을 벗어난 이들 가운데 “차라리 이런 시험이 더 낫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맞고 틀리고가 똑 떨어지는 사지, 오지선다형 문제를 치러서 그 점수에 따라 일렬로 줄 세우는 게 최고의 방법이라는 주장을 내세운다. 창의 어쩌고 한다고 시험제도 복잡하게 만들어봐야 정보력과 교육열이 앞선 이들이 절대적으로 유리하다는 이유를 댄다. 또 그렇게 하면 어차피 ‘돈’ 쓰고 ‘빽’ 쓸 것이라는 믿음 또한 굳건하다.

‘개천의 용’이란, 이 주장을 압축한 하나의 키워드다. “그냥 성적으로 일렬로 쭉 세운 뒤 배분하라, 그래야 믿을 건 머리 하나뿐인 아이들이 성공할 수 있다!”

사실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의 유명한 비유 ‘샤워실의 바보’(지나친 개입이 역효과를 낼 수 있다는 주장)는 입시제도 분석에 가장 알맞다. 어떤 방안을 내놔도 무적의 엄마부대는 우회로를 찾아낸다. 대통령더러, 교육전문가들더러 뭐라 할 게 아니다. ‘샤워실의 바보’ 논법에 따르자면 해법은 딱 하나다. 자유대한은 자유시장 논리에 따라 내버려둬야 한다.

지난해 11월 서울의 한 고등학교에 마련된 2017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고사장에서 후배 학생들이 선배 수험생들을 응원하고 있다. 말 그대로 대학에서 공부할 자격이 있는지 확인하는 이 시험이 언제까지 전 국가적 이벤트로 치러져야 하는가. 한국일보 자료사진
지난해 11월 서울의 한 고등학교에 마련된 2017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고사장에서 후배 학생들이 선배 수험생들을 응원하고 있다. 말 그대로 대학에서 공부할 자격이 있는지 확인하는 이 시험이 언제까지 전 국가적 이벤트로 치러져야 하는가. 한국일보 자료사진

교육문제를 어찌 그럴 수 있느냐 한다면, ‘샤워실의 바보’ 논리가 일러주는 또 하나의 선택지는 ‘충격요법’이다. 묘안을 짜내 봐야 우회로가 즉각 개척되는 시스템이라면, 남은 선택은 상대가 예상 못하도록 움직이는 거다. 가령, 첫 해엔 6월에 갑자기 수능을 치른다. 다음 해엔 3월에 모의고사 한번 치른 뒤 “사실은 이게 진짜 시험이었다”고 선언하는 거다. 그 다음 해엔 시험을 3번 쳐놓고 “올해 대입은 사실 내신으로 하기로 했다”고 발표하는 거다. 명분이야 만들기 나름이다. ‘평소 실력이 진짜 실력!’ 정도면 되겠다.

그런데 실제로 이러면 학생, 학부모 게거품 물고 쓰러지고 민란이 일어날 게다. 온 국민의 관심사 ‘시험’을 프리즘으로 삼아 한국 사회를 들여다 본 ‘시험국민의 탄생’의 저자 이경숙이 꺼낸 카드는, 그래서 ‘추첨제’다. 주요 입학 자격을 추첨으로 정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리 좋아하는 ‘북유럽 사례’도 있다.

의ㆍ치의예과, 법학과 등 전문직과 관련 있는 학과는 한국에서처럼 네덜란드에서도 인기 있다. 성적순 커트라인을 적용하는 우리와 달리 네덜란드는 이런 인기학과 입학생을 추첨으로 배정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정도의 기본 점수만 있으면 된다. 여기엔 두 가지 믿음이 전제된다. 하나는 높은 점수와 성적이 훌륭한 법률가나 의사를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추첨으로 뽑힌 학생의 실력도 그리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다.

저자는 네덜란드 방식에 비하면 “사회적 약자에게 5%티켓을 나눠줬다고, 지역 학생 몇 명 뽑아줬다고 할 일 다 했다는 듯 구는 한국의 로스쿨과 유명 대학들은 보통 사람들의 노력을 얼마나 하찮게 대접하는 지 알 수 있다”고 꼬집어뒀다. 학생들 평가방식 역시 선생님 뿐 아니라 학생 자신과 동료들의 평가까지 함께 들어가는 집단평가 방식이어야 한다.

단,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건 이 원칙이 TV에 김기춘 우병우 같은 사람들 나올 때 욕하는 것 말고, 당신의 아들, 딸에게 똑같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조선시대 과거에서 고시와 수능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시험의 모든 것을 다루는 이 책의 첫 번째 타깃은 살펴봤듯 ‘개천의 용’이다. 반론은 간단하다. “개천의 용은 한국인들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상상의 동물에 불과하다.” 용은 지금 우리 곁에 살아 숨쉬는 동물이 아니다. 예전 고도성장기에 더러 발견됐던 ‘작은 용’들 때문에 유지되고 있는 신화일 뿐이다.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어쩌다 나온 용 한 마리 있다고 모두에게 용이 되라고 한다면 사회는 바뀌지 않는다. “오직 실력 하나만 묻겠다는 논리”야 말로 사회적 약자들에게 또 다른 차별이자 폭력이다.

'개천에서 난 용'을 위해 사법시험을 존치해야 한다는 주장이 끊이지 않았다. 로스쿨의 문제점을 문제점대로 두더라도 사시가 개천에서 난 용을 보장해주는지, 또 그 용이 바람직한지에 대한 얘기는 빠져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개천에서 난 용'을 위해 사법시험을 존치해야 한다는 주장이 끊이지 않았다. 로스쿨의 문제점을 문제점대로 두더라도 사시가 개천에서 난 용을 보장해주는지, 또 그 용이 바람직한지에 대한 얘기는 빠져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걸 이제야 새삼 안 것도 아니다. 미국 학자 마이클 영은 1958년에 이미 ‘능력주의’(메리토크라시ㆍmetritocracy)라는 말을 만들어 썼다. 열심히 공부해 이 자리를 차지했으니 이 정도는 누릴 자격이 있다는 생각이 능력주의다. 영은 메리토크라시가 디스토피아를 불러온다고 경고했다. 성공한 엘리트들이 당연하다는 듯 돈과 권력을 누릴 경우, 이를 견제할 사람이나 논리는 고갈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타깃은 ‘시험국민’의 탄생이라는 책 제목에서 드러난다. 주구장창 시험을 치게 하는 명분은 실력향상이다. 저자가 여러 실험 결과를 소개하면서 시험을 많이 치른다고 해서 성적이 오르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제시한다. ‘딱’ 보고 ‘착’ 푸는 기술만 늘 뿐이다. 그럼에도 왜 그리 시험, 시험할까. “시험은 지식의 습득을 돕는 역할보다는 학생들을 학교의 관료주의적 필요에 맞추고, 미래의 고용주들이 여러분에게 원하는 행동양식과 이데올로기에 맞추기 위해 사회화하고 분류하는 역할을 더 많이 한다.” 기업이 아무리 맞춤형 인재가 부족하다 해도 우리는 이미 ‘준비된 회사원들’이다.

무엇보다 방대한 현장 연구를 수행한 표시가 역력한 노작이라 여러 목소리, 사례가 다양하게, 그리고 싱싱하게 살아있다는 점이 좋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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