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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필의 제5원소] 너드의 체면을 살려준 블랙리스트

입력
2017.12.05 13:36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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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드(nerd)’라는 말을 검색해 보면 ‘세상물정 모르는 공부벌레’라는 설명을 볼 수 있다. 한때 아주 인기 있었던 미국 시트콤 드라마 ‘빅뱅이론’의 등장인물들이 전형적 예이다. 대학교 물리학과에서 11년 동안 학사, 석사, 박사과정을 지낸 경험을 돌아보면 확실히 ‘너드 권하는’ 분위기가 있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세상사 따위는 되도록 관심을 끊고 오로지 과학에만 정진하는 것이 미덕이었다. 아마 다른 이공계 분야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 분위기에서 오래 살아 온 내 몸에도 너드의 피가 흐르고 있다. 다만 세상물정에 아주 약간의 관심이 더 있었던 탓에 이명박 정부 내내 정권을 비판하는 글을 인터넷 매체에 쓰곤 했다. 주변에서는 쓸데없이 물리 말고 다른 일을 한다며 타박을 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다 정권에 찍혀서 불이익을 당하지나 않을까 걱정해 주었다. 그때 나는 그런 걱정이 ‘세상물정 모르는 공부벌레’들의 기우라고 치부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형식적 민주주의가 어쨌든 완성되었고 아무리 보수적인 이명박 정부라 하더라도 시대를 거꾸로 돌리는 짓을 하지는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내가 틀렸다. 정권에 밉보인 문화예술계 인사들은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라가 철저하게 핍박 받았다.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지난 2012년 4ㆍ11 총선 때 정권심판 여부로 투표하자고 썼던 나의 글이 종북 선동의 사례로 지목돼 군 사이버사령부에서 당시 김관진 국방장관과 청와대에 보고하기도 했다. 외적에 맞서 나라를 지켜야 할 국방장관이 왜 일개 너드 따위가 쓴 정치칼럼에 관심을 가졌는지, 그런 정치군인을 며칠 전 법원은 왜 풀어줬는지, 나는 아직도 궁금하다. 그리고 두렵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는 박근혜 정부로도 이어졌다. 이명박 정부의 국정원과 군대가 조직적으로 치밀하게 여론을 조작해 정권재창출한 정부였으니 블랙리스트가 없었다면 오히려 이상했을 것이다. 초파리를 연구하는 캐나다의 김우재 교수는 올해 초 문화계 블랙리스트가 부럽다는 글을 썼다. 그만큼 문화계의 영향력이 엄청나다는 방증이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블랙리스트조차 없는 한국 과학계를 한탄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과학계는 위협적이지 않다는 뜻이니까”.

과학계를 통제하는 방법은 어렵지 않다. 지난 2010년 천안함 사건이 터지고 합동조사단이 진상규명 결과를 내놓았을 때 각 분야 전문가들이 제 목소리를 내기 꺼린다는 이야기를 주변에서 많이 들을 수 있었다. 신변이나 생계에 직접적 위협을 느낄 정도는 아니더라도 연구비나 인사 등에서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걱정을 누구나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과학계 블랙리스트는 작성도 되기 전에 이미 이런 식으로 작동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과학기술의 사회적 파급력이 나날이 커지는 21세기에 권력자가 이처럼 과학기술인을 감시하고 통제하기가 쉬워진다면 그 폐해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치명적일 수 있다. 과학기술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으면 그 자리에는 권력과 결탁한 사이비과학이 활개를 칠 가능성이 높아진다. 4대강을 뒤덮은 이른바 ‘녹조 라떼’를 보고서도 수질이 좋아졌다는 궤변을 아직도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정보기관 및 군대를 동원한 여론조작과 청와대가 주도한 블랙리스트 작성은 지난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사실상 감시와 통제로 헌법과 민주주의를 유린했음을 증명하고 있다. 감시와 통제는 과학의 작동원리와도 상극이다. 과학기술계가 그 동안 부정한 정권에 맞서 우리의 가치와 원칙을 얼마나 지키려고 했는지, 오죽하면 블랙리스트가 없어도 되는 현실을 부끄러워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는지, 한번 돌아볼 때도 되었다. 역대 거의 모든 정부는 과학기술을 무언가를 위한 수단으로만 생각해 왔다. 때로는 조국근대화를 위해, 때로는 창조경제를 위해 존재할 뿐 그 자체의 가치와 존재의의를 인정받지 못했다. 법과 제도도 그에 맞춰 뒤틀려왔다. 며칠 전 국회에서는 연구개발 예산권을 과기부로 이관하려던 시도에 제동을 걸었다. 어쩌면 지금까지 우리 스스로가 존재가치를 인정받기를 거부한 채 무언가를 위한, 누군가의 정치적 아젠다를 위한 소모품으로 만족했는지도 모른다. 과학기술은 그 자체의 작동원리와 발전논리가 있다. 여기에 경제논리나 정치적인 이해득실, 정략적인 판단이 개입하면 과학기술은 망가진다. 적어도 집단으로서의 과학기술계에게는 사회성이 다소 부족한 너드의 본성이 오히려 과학기술의 독립성과 중립성을 지키는 미덕이 될 수 있다.

박근혜 정부에서 과학계 블랙리스트를 만들었다는 뉴스를 듣고서 캐나다의 김 교수가 생각났다. 이제는 문화예술계를 너무 부러워하지 말라는 말을 그에게 전하고 싶다. 과학계 블랙리스트 작성을 주도한 것은 당시 우병우의 민정수석실이었다고 한다. 박근혜도 최순실도 김기춘도 모두 옥중에 있는 마당에 우병우 전 수석은 혼자 번번이 구속을 피해 왔으니 실질적 ‘권력서열 1위’가 아닌가. 우리 이공계 너드들이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이종필 건국대 상허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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