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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아빠를 찾아서

입력
2017.02.08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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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같은 방송 프로그램에 함께 패널로 출연하는 지인의 딸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의정부를 찾았다. 태어나고 자란 서울 수유리에서 멀지 않았지만 의정부는 내게 낯선 도시였다. 축하 인사를 드린 다음 예식장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내비게이션을 켰다. 그 순간 의정부 바로 위에 있는 한 지명이 눈에 들어 왔다. 포천이었다. 지금쯤 아이는 교회에서 친구들과 놀고 있을 터이니 내겐 시간의 여유가 있었다. 포천을 향해 차를 몰았다.

43번 국도를 따라 축석령이라는 고개를 넘으니 포천이 펼쳐졌다. 가구 단지가 줄지어 있는 한갓진 전원 풍경을 옆에 두고 달리다 보니 어느새 포천 시내에 들어섰다.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다가 내가 찾던 상점을 발견했다. 젊은 부부가 운영하는 꽃집이었다. 노란색 국화를 산 다음 나는 다시 북쪽으로 향했다. 그동안 이 길을 다른 이들과 함께 와본 적이 있었는데도 혼자 찾아오니 모든 게 새로웠다.

내비게이션이 가리키는 도착지가 멀지 않았다. 43번 국도에서 샛길로 들어서니 기억이 또렷해졌다. 좁은 시골길을 따라 가다가 초등학교를 옆에 끼고 낮은 언덕을 넘어가니 산등성이에 묘원이 펼쳐졌다. 주차장에 차를 세워 두고 눈이 아직 녹지 않은 미끄러운 비탈길을 올라갔다. 마음이 쓸쓸했다. 아니 푸근해졌다. 의정부에서 출발해 1시간 만에 도착한 곳. 노란 국화를 앞에 두고 기도를 올렸다. 아빠 묘지였다.

아빠는 고고학과 고미술을 공부하셨다. 수유리에 살았을 때 아빠 서재에는 고고학과 고미술 자료가 빼곡히 쌓여 있었다. 값비싼 것은 아니었으나 마당에는 크고 작은 유물들이 놓여 있었다. 아빠는 고서화나 골동품을 감상할 때 가장 행복해 하셨다. 서재에서 오래된 글씨나 그림을 바라보는 아빠의 눈빛은 언제나 그윽하셨다. 어떤 때는 작품들을 뚫어지게 지켜보며 넋을 잃은 듯한 표정을 지으시기도 했다. 20여년 전에 돌아가신 아빠에 대한 기억이다.

이랬던 아빠와 나는 많은 얘기를 나누진 않았다. 또래의 다른 아이들처럼 아빠를 속으로 좋아했지만 겉으론 표현하지 않았다. 그런데 피는 물보다 진한 걸까. 어릴 적 미술에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던 내가 지난 2년 동안 한 월간지에 미술과 심리에 관한 에세이를 연재하는 것을 돌아보면 우리 두 사람이 많이 닮아 있음을 깨닫게 됐다. 살아 계셨더라면 철없는 막내딸이 회화에 관한 글을 쓰는 것을 보고 무엇이라고 얘기하셨을까. 현대 미술보다 고미술에 관심을 두라고 말씀하셨을까.

아빠의 모습은 사회 변화에 따라 바뀐다. 2008년부터 2015년까지 소셜미디어(블로그)에 올라온 7억여건의 문서를 분석한 결과를 보면, ‘엄마(어머니)’가 ‘무섭다’는 말의 연관 단어 순위 1위를 차지했다. ‘아빠(아버지)’는 ‘친구’ ‘오빠’ ‘언니’ 등에 이어 11위에 올랐다. 이 자료는 아빠가 더 이상 엄격한 존재가 아니라 친구 같은 존재로 변화했음을 보여준다. 주위를 둘러봐도 맞는 얘기다. 50ㆍ60대 아빠는 여전히 가부장적인 엄중한 존재가 되길 원하지만, 30ㆍ40대 신세대 아빠는 친구 같은 다정한 사람이 돼 주려고 한다. 아빠와 영원히 함께할 순 없겠지만 어릴 적 아빠에 대해 품은 소중한 기억과 추억은 나중에 아빠가 부재할 때도 삶의 어려움을 헤쳐 나갈 힘과 용기를 줄 수 있다.

기도를 드린 후 주위를 둘러보니 설 직전이라 그런지 묘원을 찾아온 이들이 눈에 띄었다. 저 사람들 역시 나처럼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아빠 또는 엄마를 찾아온 걸까. 기억이 주는 힘과 용기를 다시 얻어 가는 걸까. 서울에서 멀지 않은 곳인데도 묘원에 부는 바람은 매서웠지만 마음만은 따듯해졌다. 짧은 겨울 해가 어느새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눈이 아직 녹지 않은 미끄러운 비탈길을 조심스레 내려오며 나는 두고 가는 아빠를 여러 번 돌아보곤 했다.

박상희 샤론정신건강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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