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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로메로

입력
2017.03.24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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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3.24

엘살바도르의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가 1980년 3월 24일 별세했다. utac.ac.cr
엘살바도르의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가 1980년 3월 24일 별세했다. utac.ac.cr

1970년대 말 중앙아메리카 엘살바도르의 정정은 우파 군부정권과 좌익 반군의 대립으로 혼미했다. 폭력과 테러가 일상이었고, 가톨릭 교회도 대상에서 빠지지 않았다. 오스카 로메로(Oscar Romero) 대주교가 벨기에 카톨리크 드 루방(de Louvain)대를 방문한 건 1980년 2월. 직전 3년 사이 50여 명의 신부가 정부 암살단 등에게 테러를 당했고, 6명이 숨졌다. 로메로 주교는 연설에서 “중요한 것은 왜 교회가 박해를 당하는가 하는 점이다. 모든 성직자가 공격받는 것도 아니고, 모든 교회가 타깃이 되는 것도 아니다. 공격받은 이들은 모두 시민들의 편에 서고자 한 이들이었다. 핵심은 빈자에 대한 태도다.”

한 달 뒤인 80년 3월 24일, 엘살바도르 수도 산살바도르 병원의 ‘천주 섭리 소성당’에서 가진 그의 강론 요지도 그거였다. 빈자의 편에 서서 억압에 저항하며 불의와 폭력에 굴하지 말라는 것. 이날 뒤이은 미사 도중 그는 4명의 무장괴한이 쏜 총에 숨졌다. 향년 62세.

1821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이래 150여 년 동안 엘살바도르를 지배한 건 군벌과 지주였다. 1920년대 말 대공황으로 커피 수출이 격감하고 궁핍이 극에 달하자 농민ㆍ인디오들의 저항운동이 시작됐다. 아우구스타 파라분도 마르티가 주도한 반란과 그의 사후 창설된 좌익 반군 ‘파라분도 마르티 해방전선(FMLN)’은 북부와 동부를 거점으로 급속히 세력을 확장해갔다. 잦은 쿠데타와 정권교체 속에서도 집권 우익 군벌은 암살단까지 조직해 게릴라 및 잠재적 저항세력에 대한 테러를 일삼았다. 가톨릭 해방신학자들이 타깃이 된 건, 그들이 좌파여서가 아니라 가난한 이들을 옹호하며 폭력을 비판해서였다.

보수 성향의 로메로가 성직생활을 하는 동안 점차 빈자에게 다가간 것도 그 곳이 교회의 자리, 신앙의 자리라 여겨서였다. 그는 스스로를 해방신학자라 여기지 않았지만, 누구보다 선명한 해방신학자였다.

그의 사후 영국 성공회를 비롯해 여러 기독교 교파와 교단이 그의 순교를 기렸지만, 정작 로마교황청의 평가는 인색했다. 그의 좌파 성향 때문이었다. 1997년에야 그의 시성 검토를 시작한 바티칸은 2015년 5월에야 그를 복자로 시복했다. 교황청의 판단과 무관하게 그를 진정한 성인으로 여겨온 세계인들은 그가 천국에 든 3월 24일을 로메로 축일로 기린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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