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자 10만명을 죽여 물고기 밥이 되도록 마닐라 앞바다에 버리겠다.”
지난해 5월 필리핀 남부 민다나오섬 다바오시의 시장 로드리고 두테르테는 현지 언론과 인터뷰에서 무시무시한 발언을 했다. 1년 뒤 시행되는 대통령 선거에 당선되면 6개월 안에 범죄자들을 처형해 범죄를 뿌리뽑겠다는 것이다.
과거의 놀라운 전력을 보면 단순 엄포로만 보이지 않는다. 그는 22년간 시장을 지내면서 무장 사병 집단인 자경단을 운영하며 재판을 거치지 않고 1,000명 이상의 범죄자를 처형했다. 심지어 그는 3명의 범죄자를 직접 총살했다고 인정했다.
그래서 그는 ‘징벌자(The Punisher)’또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주연한 영화 ‘더티 해리’에서 거대한 매그넘 권총으로 범죄자를 마구 사살하던 주인공을 빗대어 ‘두테르테 해리’ 등으로 불린다.
당시 필리핀과 국제사회는 이 같은 사실을 크게 문제삼지 않았다. 변두리 시장인 그의 정치적 영향력을 높게 평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올해 대통령 후보로 급부상하면서 모든 게 달라졌다. 급기야 지난 11일 치른 필리핀 대통령 선거에서 그는 600만표라는 압도적 차이로 당선됐다.
초법적 살인 행위까지 저지른 인물이 투표라는 민주적 절차를 거쳐 국가를 대표하는 수장에 등극하는 초유의 일이 벌어진 것이다. 1986년 독재자 마르코스를 몰아낸 ‘피플파워(민중혁명)’로 민주화 바람을 일으켰던 필리핀 국민들이 이처럼 파격적 선택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범죄 소굴’로 전락한 나라
필리핀은 1946년 미국의 식민지배를 벗어난 뒤 일본에 이어 아시아에서 가장 잘 나가는 국가로 도약했다.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입은 피해가 다른 국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크지 않았고 자원과 농산물이 풍부한 덕이었다. 여기에 20년 넘게 지속되던 독재정권을 몰아낸 1986년 피플파워는 한국과 태국, 대만의 민주화 운동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30년이 지난 지금 필리핀은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분야에서 후진국으로 전락했다. 지난해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우리의 10분의1 수준이고, 월 평균 수입이 23달러(약 2만2,000원)에도 미치지 못하는 극빈층이 전체 인구의 35%를 차지한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도를 넘어선 치안 불안이다. 매춘과 살인, 시체 유기, 마약 거래 등 각종 범죄가 성행하고 일부 지역에서는 내전까지 벌이고 있다. 여기에 공권력까지 부패했다. 경찰과 마약상이 돈으로 연결돼 있고, 200달러만 내면 언제든 암거래상을 통해 총을 구입할 수 있다. 그만큼 영화에서나 볼 법한 무법지대가 오늘날 필리핀의 현실이다. 당연히 필리핀 국민들은 극도의 불안 속에 살고 있다.
두테르테 당선자가 급부상한 것은 이 같은 필리핀의 상황이 강하게 작용했다. ‘강력한 법 집행자’라는 그의 이미지가 치안 불안에 떠는 필리핀 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킬링필드’ 다바오를 세계에서 5번째 안전한 도시로
1945년 필리핀 남서부 레이테주에서 태어난 두테르테 당선자는 고교 시절 2번이나 퇴학을 당한 ‘문제아’였지만 산베다대 법대에 진학했고 변호사 시험까지 합격했다. 그는 지방검사 시절부터 범죄 소탕에 대한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1988년 마약과 범죄로 악명 높은 다바오 시장에 당선된 뒤 1998년까지 연임했다. 3번 이상 시장을 할 수 없는 규정에 걸려 선거에 나올 수 없게 되자, 아들을 선거에 보내 당선시킨 후 2001년에 시장에 나와 다시 3번 연임을 하는 기염을 토한다.
다시 연임 제한 규정에 걸린 2010년에는 딸 사라 두테르테 카르피오를 선거에 내보내고 자신도 부시장으로 동반 출마해 승리하면서 딸이 시장, 아버지가 부시장인 체제로 운영되기도 했다. 사실상 30년 가까이 다바오시의 군주로 군림해 온 셈이다.
장기 집권의 비결은 무관용 원칙으로 벌인 범죄와 전쟁이다. 특히 그는 자경단을 조직해 마약상 조직폭력배 납치범 등 강력범들을 잡으면 재판도 없이 즉결 처형했다. 필리핀 시민단체 등에 따르면 그의 시장 재임기간 처형된 범죄자가 1,700명이 넘는다는 주장도 있다.
그 결과 다바오시는 필리핀에서 치안 수준이 가장 높고 외국인 투자가 활발한 도시가 됐다. 그는 “‘킬링필드’로 불리던 다바오를 세계에서 5번째 안전한 도시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가문정치 후광과 개혁가 이미지가 공존
범죄 척결과 더불어 두테르테 당선자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점이 바로 집안이다. 필리핀은 정치적 명망이 높은 집안들이 주요 요직을 차지하는 ‘가문 정치’가 성행하는 국가다.
1986년 피플파워로 마르코스를 몰아낸 뒤 독재의 빈 자리를 메운 것이 가문 정치다. 상원, 하원, 주지사, 시장은 물론 동네 면장까지 특정 집안이 대물림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따라서 주요 선거는 명망가 집안의 대결이나 다름 없고 정당 정치도 지역 토호들 간 쟁투로 변질됐다. 현재 집권 중인 베니그노 아키노 역시 부모(코라손 아키노)의 후광 덕에 대통령이 됐다.
두테르테 당선자도 마찬가지다. 아버지 빈센트는 세부주 다나오의 시장을 지냈고 사촌 로날드도 세부시 시장을 역임했다. 두테르테 당선자도 다바오 시장 선거에 딸 카르피오를 내보내 당선시켰다.
다만 두테르테 당선자는 다른 정치가들처럼 가문정치의 후광을 입었지만 범죄 척결 전력 때문에 필리핀 국민들 사이에 개혁가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이 또한 필리핀 국민들이 그에게 기대를 거는 부분이다.
필리핀의 여론도 두테르테 당선자에게 우호적이다. 갈수록 흉폭해지는 범죄를 뿌리 뽑으려면 철권 통치가 ‘필요악’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필리핀 언론 ‘인콰이어러’는 “지금 필리핀은 두테르테에게 잘 보여 범죄와 부패 척결조치에서 살아 남으려는 부패공무원 집단과 거꾸로 그의 공약이 철저하게 잘 지켜지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국민 등 두 갈래 움직임이 있을 뿐이다”고 대선 이후 분위기를 전했다. 월스트리트저널도 필리핀 대선 결과를 “필리핀 국민들이 리콴유(李光耀) 전 싱가포르 총리처럼 부정부패와 범죄를 막고 국민들을 이끌 강력한 지도자를 택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결국 독재자의 전철 밟을 것”
하지만 해외의 시선은 다르다. 해외 언론들은 두테르테 당선자가 자극적 공약으로 대통령에 당선됐지만 결국 독재자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포츠머스대 국제관계학 강사 톰 스미스의 기고문을 통해 “두테르테는 언론의 철저한 검증이 없었기에 부패한 체제에 맞선 사람으로 포장했다”며 “트럼프는 기행과 독설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의 틀을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지만 두테르테는 과거 독재자처럼 철권통치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 큰 차이”라고 전했다.
특히 해외에서는 두테르테 당선자를 좌충우돌식 언행 때문에 더욱 불신하고 있다. 그는 유세 도중 1989년 다바오 교도소 폭동사건 때 수감자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하고 살해된 호주 여성 선교사에 대해 “그녀는 아름다웠다. 시장인 내가 먼저 해야 했는데”라고 말해 호주 대사에게 항의를 받기도 했다. 지난해 필리핀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해서도 교통체증을 유발했다며 욕설을 내뱉어 국제적으로 논란이 됐다.
두테르테 당선자는 이 같은 해외 여론을 의식한 듯 대통령에 당선된 뒤 과격한 이미지와 막말, 기이한 공약들이 “당선을 위한 선거전략일 뿐”이라고 물러서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범죄 척결과 관련된 강경 발언은 선거전략이 아닌 공약이라고 강조했다. 그만큼 두테르테에 대한 필리핀 안팎의 기대와 불안이 교차할 수 밖에 없다.
유환구기자 reds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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