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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영의 화해] 친정도 남편도 떠넘기기만... 이런 인생서 도망치고 싶어

입력
2017.12.25 04:40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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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나 혼자 외벌이-밤샘 근무-육아

남편은 빨래하고 쓰레기만 버려

“자격증 딴다” “여행 가자” 말에

싫은 소리 못하고 참기만 해

가정사 하소연하면 비아냥거려

결혼 4년 차의 외벌이 엄마입니다. 결혼 직후 아이가 생겼고 출산하고 1년 정도 육아 휴직을 해서 아기를 키웠습니다. 그때까진 그냥 평범한 가정이라 여겼어요. 육아도 힘들지만 아이가 사랑스러워 행복했습니다. 남편은 육아나 살림을 도와주지 않았지만 제가 집에 있으니 제 몫이라 생각하고 큰 불만 없이 지냈어요. 그런데 제가 육아휴직을 끝내고 복직을 하자 남편이 자기가 아기를 키우고 싶다고 하더군요. 20대부터 이제껏 고생만 했다면서 자기도 쉬고 싶다고 회사를 관뒀습니다. 이후 저는 지금까지 약 2년 동안 집안의 가장 역할을 하고 있어요.

당시엔 남편이 힘든 것도 이해했고 아기를 자기 손으로 키우고 싶다는 말도 좋아 동의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이도, 남편도, 제 가정조차 모든 게 짐으로 느껴져요. 남편이 가사와 육아를 담당하겠다길래 저는 제가 한 것처럼 집안일을 전부 하겠다는 것으로 이해했어요. 그런데 남편은 부엌일은 절대로 할 수 없다고 해요. 가사 분담으로 몇 개월 간 심하게 다투기도 했어요. 지금은 빨래랑 쓰레기 버리는 일만 남편이 하고, 밥하고 설거지하고 장보는 건 제가 하고 있습니다. 육아는 제가 3교대 근무라 철야 근무 때만 남편이 데리고 자요. 힘들게 밤샘하고 돌아와 아이와 남편 아침을 챙기고 어린이집을 보내고 와서 잠이 들 때면 서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계수입이라곤 제가 버는 300만원 조금 넘는 돈이 전부인데 남편은 여행을 계획하는 등 맞벌이 때와 비슷한 소비생활을 유지하려 합니다. 게다가 둘째까지 낳고 싶다고 하네요. 소득이 없어서 힘들어진다 하니 제가 육아휴직을 하면 자기가 돈 벌러 나가겠다고 해요. 돈 아낄 생각은 안 하고 부모님이 가진 재산을 팔아서 대출을 갚겠다거나 공인중개사 시험을 보겠다는 등 철 없는 소리만 하는 통에 남편에게 실망을 많이 한 상태입니다. 이제 대출도 버거워 집을 팔고 다시 전세를 알아보는 상황인데 가장으로서 책임감이 없는 남편을 믿고 의지할 수 없다는 생각에 슬픕니다.

저란 인간은 어릴 때나 성인이 돼서나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고 그냥 누군가를 돕기 위해 태어난 인생인 것 같아요. 어릴 때도 제 목표는 엄마를 힘들게 하지 않는 거였어요. 부모님은 자주 다투셨고 엄마는 아빠에게 맞은 적도 많아요. 부모님은 맞벌이를 하셔서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집안일은 전부 제 차지였어요. 취업하기 전까지 식구들 식사, 청소, 빨래는 제 몫이었습니다. 엄마, 아빠는 자식들 때문에 못 헤어진다는 말을 자주 하셨어요. 그럴 때마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거나 아파서 죽으면 좋겠단 생각을 했습니다. 부모님은 늘 돈 문제로 힘들어해 전 취업이 잘 되는 대학을 택했고 결혼 전까지 약 1억원을 벌어서 부모님께 보태드렸어요.

남편과 결혼 전 8년 정도 연애를 했는데, 제가 위로 받고 싶은 마음에 어릴 적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이게 문제였던 것 같아요. 남편은 싸울 때 종종 ‘집에서 대접도 못 받고 큰 주제에 왜 나한텐 대접받으려고 하냐’고 했습니다. 결혼 후 친정식구들과 여행을 간 적이 있는데 다녀온 뒤 남편이 입에 담지 못할 욕설과 함께 제게 ‘가족들의 종이냐’고 하더군요. 저는 부부는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줘야 한다는 생각에, 제가 한 말이 상처로 돌아올 거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요.

싫은 소리 못하고 참던 게 어릴 때부터 제 삶의 패턴이라 계속 그렇게 흘러간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이제는 좀 지치는 것 같습니다. 엄마 아빠 식구들 그리고 남편과 아이와 상관없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얼마 전 남편과 심하게 다퉈서 이혼 얘기가 나왔는데 ‘아기를 두고 너만 나가라’는 말에 그러면 홀가분하겠다는 못된 생각까지 들더군요. 아이한테 미안하지만 이렇게 평생 아이와 남편을 부양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 화가 치밀어요. 하지만 제가 일하는 상황에서 남편에게 돈을 벌어오라고 하면 너무 나쁜 사람이 되는 거 같아 쉽사리 그 말이 나오지도 않습니다. 남편을 미워하는 것도 너무 지치고 아기도 많이 예민해 다루기가 어렵네요. 삶이 피곤해요. 도망가고 싶어요.

(이신영, 가명ㆍ38세ㆍ간호사)

A

남편 무책임한 태도 쉽게 안 변해

마음 속에서 남편 비중 줄이고

부족한 애착-소통, 아이와 채워야

상처 대물림만 하지 않아도 성공

‘엄마로서의 몫’ 당당히 주장해야

신영씨, 부부에게 있어 배우자는 어떤 사람이어야 할까요. 부부는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역할을 해주는 존재여야 할까요. 가장 바람직한 배우자는 상대방의 아픔과 고통마저 잘 알고 있어야 해요. 이 사람이 어떤 것에 고통을 받으며 살았는지, 어떨 때 아파하는지, 어떤 걸 제공해야 가장 안정되고 행복하다고 느끼는지,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알고 있어야 해요. 부부는 정서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가장 가까운 사이여야 합니다.

물론 이 조건을 다 채우는 부부는 실제로 많지 않을 거예요. 그러나 어떤 면에서든지 조금씩은 채워져야 한다는 겁니다. 부부의 사랑은 타인과 나눌 수 없는 독점적 사랑이에요. 그 사랑 안으로 누군가를 끼어 들게 할 수 없기 때문에 배타적인 사랑이라고 합니다. 이는 배우자에게 있어 다른 배우자가 가장 우선순서를 차지해야 한다는 걸 의미해요. 어찌 보면 부모와 자녀의 관계와도 유사하죠. 그러나 어린 시절 부모-자녀의 관계는 부모가 일방적으로 사랑을 내어주는 거라면, 배우자는 서로 사랑을 줘야 해요. 상호관계라는 거예요.

지금 신영씨를 괴롭히는 것 중 하나는 경제적인 문제예요. 매일매일 입에 풀칠하며 사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 안정된 삶을 살면서 아이에게 뭔가 해주고 싶은 마음이 커요. 제가 신영씨에게 꼭 이야기해주고 싶은 건 이건 욕심이 아니라는 거예요.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렇게 하길 원해요. 약간의 여유를 가지고, 여행을 간다고 해도 혼자가 아니라 아이를 데리고 가족이 함께 가고 싶어 하죠. 그런데 신영씨의 남편은 마치 한 달만 살고 말 사람처럼 보여요. ‘네가 벌면 내가 쉬고, 네가 쉬면 내가 벌면 된다’는 경제관념은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 사람의 것이에요. 아마 남편으로부터 중요한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다는 믿음을 갖기가 어려울 거예요. 신영씨의 부모도 당신이 성인이 될 때까지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지지해주지 않았죠. 신영씨는 자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으로부터 중요하게 여김 받는 경험을 지금까지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

신영씨의 고통의 원인도 인생에서 믿고 기댈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 어릴 땐 부모가 그랬고, 지금은 남편이 그렇죠. 신영씨는 남편을 의지해서 어린 시절의 아픔을 이야기했지만 남편으로부터 돌아온 건 비아냥이었어요. 오히려 아픔을 얘기한 것 때문에 더 많은 홀대를 받았죠. 어릴 때의 고통이 현재의 가장 중요한 사람으로부터 재현되고 있는 셈이에요. 여기에서 온 결핍감 때문에 신영씨는 자기 존재가치에 대한 의심을 품게 됐을 거예요. 내가 이만큼 가치 없는 사람인가, 하는 생각에 우울하고, 미래에 대한 장기적인 그림을 그릴 수 없어 불안할 겁니다. 아이의 장래에 대한 생각, 노후에 관한 계획 등을 남편과 전혀 의논할 수 없는 상황이에요.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야속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신영씨의 남편에겐 엄청난 변화를 기대하기 어려워요. 남편은 배우자의 기본 역할을 떠나 결혼한 남자로서 거쳐야 할 변화를 전혀 수용하고 있지 않아요. 그러므로 전 남편이 앞으로도 변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럼 신영씨는 어디서 힘을 얻을까요, 앞으로 어떻게 삶을 살아갈까요.

미안하지만 전 신영씨가 자녀에게 자신의 어린 시절을 물려주지 않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성공과 영광이라고 봐요. 이것 자체가 자신의 인생을 극복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이 삶을 억울해하지 말고 자녀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남편에게서 충족하지 못한 애착과 소통의 관계를 아이와 채우세요.

그런데 여기에 남편의 비중이 너무 커지면 억울해지거든요. 신영씨는 어릴 때부터 중요한 사람으로 여김 받는 경험이 결핍돼 있기 때문에 여전히 마음 속으로 그걸 갈구하고 있어요. 현재는 그 대상이 남편인 거예요. 그러나 이혼할 준비가 안돼 있다면 어쩔 수 없이 마음 속에서 남편의 비중을 줄여야 합니다. 남편에겐 그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역할을 주고 그것만 해달라고 하는 게 좋습니다. 예를 들어 ‘무슨 일이 있어도 설거지는 당신 몫’ ‘수입에서 당신이 놀러 가는 비용은 제외’처럼요. “억울하면 쉬어, 내가 벌게” 같은 말에 휘둘리지 마세요. 아이의 엄마로서 요구하세요. ‘나는 아이가 정신적ㆍ신체적으로 독립할 때까지 엄마로서 해줘야 할 몫이 있다. 수입이 적기 때문에 당신의 여가에 돈을 쓸 여유는 없다. 이건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를 위해서다’라고 하세요. 중요한 건 남편이 그 말을 받아들이든, 안 받아들이든 확실하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남편에게 기대하지 말란 제 말이 너무 가혹하게 들릴 수도 있어요. 하지만 신영씨가 아이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면, 아이가 커가는 과정에서 엄마에게 많은 행복을 줄 거에요. 엄마를 가장 소중한 사람으로 여기고 깊은 사랑과 고마운 마음을 갖게 될 겁니다. 상처를 대물림하지 않는 건 아주 성숙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에요.

마음이 많이 억울할 거예요. 신영씨의 요구는 애착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할 수 있는 너무나 기본적이고 본능적인 요구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제 조언이 섭섭하고 어깨가 너무 무겁다 느껴질 수 있어요. 그러나 아무리 신영씨가 정당한 요구를 했다 하더라도 상대방의 문제 때문에 그걸 충족시킬 수 없다면, 현재의 상태를 인정하고 마음을 접는 일도 필요해요.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굉장한 상처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정리=황수현 기자 sooh@hankookilbo.com

* 오은영의 ‘화해’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오은영 박사가 지면을 통해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해결되지 않는 내면의 고통 때문에 힘겨운 분이라면 누구든 신청해 보세요. 사연은 한국일보 사이트(http://interview.hankookilbo.com/store/advice.zip)에서 상담신청서를 내려 받아 작성하신 후 이메일(advice@hankookilbo.com)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선정되신 분의 사연과 상담 내용은 한국일보 지면에 소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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