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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춘기 예능’ 중년의 로망을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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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춘기 예능’ 중년의 로망을 꿈꾸다

입력
2017.03.29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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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로 패키지 여행을 떠나는 ‘뭉쳐야 뜬다’ 출연진. 차태현(맨 오른쪽)은 정형돈에게 부탁해 이번 여행에 참여했다. JTBC 제공
라오스로 패키지 여행을 떠나는 ‘뭉쳐야 뜬다’ 출연진. 차태현(맨 오른쪽)은 정형돈에게 부탁해 이번 여행에 참여했다. JTBC 제공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내뿜은 담배 연기처럼.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고 김광석의 노래 ‘서른 즈음에’가 만들어졌던 1990년대만 해도 서른 살은 청춘과의 결별을 의미했다. 흘러간 청춘과 떠나버린 사랑을 읊조리는 쓸쓸한 노랫말이 서른 즈음을 맞이한 이들의 가슴을 적셨다.

하지만 지금의 40~50대에게 이 노랫말에 대한 감상을 묻는다면 코웃음을 칠지도 모르겠다. 서른 살밖에 안 됐으면서 세상 다 산 듯이 뭐가 그렇게 심각하냐고. 그들은 “청춘을 돌려다오”라고 부르짖는 대신 이렇게 흥얼거린다. “야야야, 내 나이가 어때서.”

최근 대중문화계에서 비춰지는 40~50대 중년 세대의 모습은 그야말로 ‘불타는 청춘’이다. 중년의 일탈과 유쾌한 삶의 태도를 다룬 예능프로그램들이 부쩍 많아졌고, 또 전 연령층에서 인기를 누리고 있다. 20대 청춘들은 오히려 삶의 무게에 짓눌려 있는데 중년 세대가 더 ‘청춘스럽게’ 자신을 발현한다. ‘중년의 사춘기’라는 뜻에서 갱년기와 사춘기를 합친 ‘갱춘기’, 또는 40대 사춘기라는 의미의 ‘사십춘기’로 스스로를 정의한다. 꼰대와 유의어였던 ‘아저씨’를 귀여운 이미지로 탈바꿈시킨 ‘아재 열풍’의 ‘진화’ 혹은 ‘심화’로도 해석된다.

영화감독 겸 배우 양익준(왼쪽)은 ‘불타는 청춘’의 새로운 막내로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SBS 제공
영화감독 겸 배우 양익준(왼쪽)은 ‘불타는 청춘’의 새로운 막내로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SBS 제공

중년도 하고 싶은 일 많아요

40대 초반은 이제 어디 가서 나이 좀 먹었다고 명함도 못 내민다. 14일 방영된 SBS ‘불타는 청춘’에서 영화감독이자 배우인 양익준이 새로 합류하자 기존 멤버들은 구본승에게 축하를 건넸다. 드디어 막내에서 벗어났다며 서로 감격스러워했다. 올해 42세인 새 막내 양익준은 형님 누님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양블리(양익준+러블리)’라는 애칭을 얻었다. 천진난만하게 숨바꼭질 놀이도 하는 모임이라 ‘42세 막내 양블리’ 타이틀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심지어 SBS ‘미운 우리 새끼’의 출연자들은 어머니의 눈을 통해 ‘철부지’로 그려진다. 소주병으로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들고, 어른 허벅지 두께만한 대왕 김밥을 싸고, 집에 횟집 수족관까지 들여놓은 김건모의 일상은 매 순간이 기행(奇行)이다. ‘개그계 신사’였던 박수홍은 이 밤의 끝을 잡고 ‘불혹의 클러버’로 온몸 불사르다 어느새 중년의 대변자로 떠올랐다. ‘중년도 하고 싶은 거 많다’고 웅변하는 듯한 이들의 삶은 중년 세대를 욕망을 지닌 존재로 새롭게 바라보게 했다.

기혼인 중년 남성들은 여행을 떠난다. 소극적인 일탈이다. 지난달 방영된 MBC ‘가출선언 사십춘기’는 정준하와 권상우의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여행기를 담아 눈길을 끌었다. JTBC ‘뭉쳐야 뜬다’는 효율성 높은 패키지 여행으로 바쁜 일상의 틈새를 영리하게 활용하고 있다. 실제로 절친한 사이인 김용만, 김성주, 안정환, 정형돈이 서로 장난치고 놀리는 모습이 꼭 10대 소년 같다. 이 프로그램은 실제 패키지 여행 상품을 활용하되 간혹 정원이 다 차지 않았을 경우 시청자 참여 신청을 받는데, 출연진과 같은 40대 중년 남성 신청자들이 상당히 많다고 한다. 최근엔 차태현도 출연을 자청해 다같이 라오스 촬영을 다녀왔다. ‘뭉쳐야 뜬다’의 성치경 CP는 “일과 가정 사이에서 개인적인 시간을 가질 수 없는 40대에게 친구들과의 여행은 불가능한 꿈이나 다름없다”며 “그 꿈이 실현되는 순간의 로망을 전달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가출선언 사십춘기’에 출연한 정준하(왼쪽)와 권상우의 개구쟁이 같은 모습. MBC 제공
‘가출선언 사십춘기’에 출연한 정준하(왼쪽)와 권상우의 개구쟁이 같은 모습. MBC 제공

저도 중년은 처음입니다

‘갱춘기 콘텐츠’는 사회 현상으로 드러난 중년 세대의 문화적 열망을 반영한다. 대형마트에 가면 키덜트족을 위한 전문코너를 쉽게 만날 수 있고, 백화점들은 남성 취미 상품만을 모은 전용관을 속속 선보이고 있다. 중년의 표현 욕구는 ‘아재파탈 패션’ 열풍으로 이어졌다. 방송프로그램도 이런 흐름에서 예외가 아니다.

육체적으로 젊을 뿐 아니라 감각도 젊어진 중년 세대의 출현은 중년에 대한 개념과 인식을 변화시키고 있다. 외모 호감도를 반영한 ‘꽃중년’부터 말이 통하는 ‘아재’와 그 반대인 ‘개저씨’, 아재의 업그레이드 버전인 ‘아재파탈’ 등으로 다채롭게 변화된 용어들이 중년 세대의 탈권위 경향을 보여준다. 특히 문화 콘텐츠는 중년 세대의 가부장적 이미지가 희석되는 과정에 주목한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예능프로그램에서 중년 남성들이 요리를 하고 육아를 하고 또래끼리 여행을 하는 모습을 과거엔 보기 어려웠다”며 “중년 세대를 예능화할 때 권위를 해체시키는 쾌감을 유발한다”고 분석했다.

갱춘기 콘텐츠의 인기에서 중년 세대의 방황을 읽는 시각도 있다. 성치경 CP는 “40~50대는 사회적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는 시기지만 그만큼 경쟁도 치열해 혼란을 겪게 된다”며 “이런 사회 현상이 중년 소재 예능에 투영돼 있다”고 말했다.

심리학에서도 40대 전후로 경험하는 정체성 혼란을 ‘중년기 위기’로 설명한다. 사회적 역할 변화와 체력 쇠퇴, 죽음에 대한 자각, 미래에 대한 불안 등으로 인해 사춘기처럼 자아 혼란을 겪는 현상을 뜻한다. 중년기 위기가 닥쳐오면 열심히 살아온 인생에 대한 보상심리와 후회가 생겨나 일탈을 꿈꾸게 된다는 것이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예능프로그램에 담긴 중년의 일탈을 보면서 시청자들은 되돌릴 수 없는 청춘에 대한 그리움과 열망을 대리만족하게 된다”며 “중년들이 체면을 내려놓고 본래 모습을 드러내는 게 허용되는 방향으로 사회 분위기도 유연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김건모는 집에 횟집 수족관을 설치하고 마치 포장마차처럼 탁자와 의자까지 마련했다. SBS 제공
김건모는 집에 횟집 수족관을 설치하고 마치 포장마차처럼 탁자와 의자까지 마련했다. SBS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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