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운영 기자

등록 : 2018.03.14 04:40

[천운영의 심야식탁]봄이 와버렸다, 아몬드 꽃이 생각나는...

등록 : 2018.03.14 04:40

게티이미지뱅크

지금 그곳은 아몬드 꽃이 한창이겠다. 스페인 말라가산 어귀에 줄지어 선 아몬드 나무들. 바람결에 흩날린 꽃잎들이 환했더랬다.마음이 요상하게 설렜더랬다. 복숭아나무야(durazno)? 내가 물었다. 알멘드라(almendra). 그가 대답했다. 고흐가 그린 아몬드 꽃이 바로 이거였어? 처음 봐. 환하게 피어오른 아몬드 꽃. 아몬드 꽃이 피었으니 이제 봄이야. 봄이 왔다는 그 전언이 떠나라는 명령처럼 명치를 찔렀다. 우리는 아몬드 꽃그늘 아래 나란히 앉았다. 나는 “도화 아래 잠들다”는 김선우 시인의 시를 찾아 읽어주었다. 그는 로르카의 시로 화답했다. 싯구들이 꽃잎처럼 한 겹 한 겹 무릎 위로 내려앉았다. 아련하고 물큰했다.

조금 있으면 오렌지 꽃이 필 거야. 봄이 절정에 올랐을 때에. 그땐 세상이 아자하르(azahar)로 가득하겠지. 오렌지꽃향기. 연인들이 오렌지 나무 아래로 숨어드는 계절. 달콤한 아자하르에 휘감겨 밀어를 속삭이는 계절. 봄의 향기 봄의 노래. 그것이 바로 아자하르라는 말. 꽃과 향기와 밀어. 그 이야기를 듣자 기타 선율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같은 곡. 추억을 부르는 꽃 향기. 아몬드 꽃이 만발한 그 산길에서, 곧 피어날 오렌지 꽃을 상상하던 그 순간, 우리는 이미 과거가 되고 있었다.

시내로 돌아와 설탕물을 입힌 아몬드를 사 먹었다. 배가 불룩한 노인이 고깔 모양 종이봉투에 아몬드를 가득 담아 손에 건넸다. 아주 어릴 적 길거리에서 사먹던 번데기 생각이 났다. 신문지를 고깔 모양으로 단단히 말아 50원어치 100원어치 담아 팔았었는데. 찝찔한 국물이 신문지로 새어 나와 손바닥으로 팔뚝으로 흘러내리곤 했었는데. 고소한 아몬드와 찝찔한 번데기에 무슨 맛의 연관이 있어서가 아니라, 다만 고깔 모양 종이봉투를 손에 들고 있는 것만으로 사십 년 전 골목을 뛰어 놀던 어린이를 불러내다니. 설탕 아몬드를 깨물 때마다 입안에서는 달고 고소하고 향긋한 맛이 돌았다가, 또 요상하게 짜고 씁쓸하고 들큰한 맛이 뒤따라왔다.

그곳을 떠나오기 전 친구들과 마지막 파티를 할 때, 시작은 역시나 하몽과 치즈, 그리고 아몬드와 말린 포도였다. 그는 그것이 와인을 위한 완벽한 조합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꿀이나 잼 같은 걸 곁들이면 더욱 좋고. 완전한 친구들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나는 와인 한 모금에 아몬드 한 알을 입에 넣었다. 완벽한 조합, 완전한 친구. 그 말이 부듯하고 서운했다. 술기운 때문인지 떠난다는 아쉬움 때문인지, 서글픈 노래를 부르고 싶어졌다. 꽃은 피고, 또 지고. 그 후의 음식들은 기억나지 않는다. 입안에서 깨어지던 아몬드의 질감만 또렷이 기억난다.

나는 오렌지 꽃이 피기 전, 그곳을 떠났다. 아자하르는 없었지만, 아몬드 꽃그늘에 앉아 로르카의 시를 읊던 기억은 지금도 여전히 코끝을 찡하게 만든다. 봄이 오면 언제나 그곳으로 돌아간다. 모든 봄꽃이 아몬드 꽃 같다. 복숭아꽃을 보아도 벚꽃을 보아도 싸리꽃을 보아도 그게 다 아몬드 꽃이다. 아몬드 가루로 반죽해 만든 마사빵(mazapan)을 먹어도, 부야베스를 만들며 마지막으로 아몬드 가루를 뿌릴 때에도, 아몬드가 아니라 아몬드 꽃 냄새를 맡는다. 그럴 때면 종종 생각해본다. 오렌지 꽃이 필 때까지 그곳에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봄이다. 기어이 봄이 와버렸다. 아몬드 꽃그늘을 추억해본다. 기타 선율에 잠겨 로르카의 시를 들려주는 봄. 그래서 한번 읊어본다. 로르카의 시를. ‘그때처럼 언제 한번 너를 사랑할 수 있을까? 내 마음에 무슨 죄가 있는가? 이 안개가 걷히면 어떤 다른 사랑이 나를 기다릴까? 그 사랑은 순수하고 조용할까? 아, 나의 이 손가락들이 달의 꽃잎을 떨어낼 수만 있다면.’(시 ‘나의 손이 꽃잎을 떨어낼 수 있다면’, ‘로르카 시 선집’ 중, 민용태 옮김・을유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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