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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국민연금 ‘조강지처론’

입력
2017.09.10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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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는 말은 거래소를 통해 유통주식을 산 주주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주가가 오르지 않을 거 같아서든, 대표이사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든 투자한 회사가 싫어지면 우리는 주식을 팔고 떠나면 된다. “떠날 수 있다(매각)”는 자기방어 행위가 기업의 시장가치를 결정해 주고, 투자자 이익을 보호해 주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럴 수 없는 투자자가 있다. 바로 국민연금이다.

국민연금은 의도한 것은 아니나, 투자자금이 많았던 탓에 어느덧 웬만한 상장기업의 1ㆍ2대 주주가 되었다. 2017년 5월말 기준 약 156조원을 국내주식에 투자하고 있고 이는 거래소 시가총액의 10%에 육박한다. 평균 10% 수준의 상장기업 지분을 보유한 셈이다. 기금이 늘어나는 향후 30년 이상 이런 추세는 계속될 수 밖에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쯤 되면, 국민연금의 투자지분의 성격은 유동성이 있는 ‘퍼블릭 스탁(Public stock)’이라기 보다는 유통시장에서 한꺼번에 매각이 불가능한 ‘프라이빗 에퀴티(Private Equity)’다. 일부 지분을 부분적으로 사고 팔 수는 있어도, 시장에 미치는 영향력이 커서 한꺼번에 보유 지분을 내다 파는 게 불가능하다. 즉, 국민연금은 이들 기업과 ‘30년 이상 헤어질 수 없는, 서로 발목 잡힌 동반자’가 되었다. 잠시 머물다가 싫으면 떠나는 애인과 달리, 떠나지 못할 운명의 부부처럼 기업에 대해 싫은 소리도 하는, 조강지처로서의 진정한 사랑을 할 때가 되었다는 말이다.

프라이빗 에퀴티 중 대주주 지분은 통상 경영권 프리미엄이 20% 이상씩 붙어 M&A시장에서 거래된다. 대주주가 아닌 경우에도 프라이빗 에퀴티 투자자들은 투자가치를 높이고자 이사회에 참여해 기업활동에 의사를 반영한다. 그런데 국민연금은 장기적으로 기업가치가 커져야만 투자가치가 지켜지는 조강지처인데도 잠시 만나는 애인처럼, 언제든 떠날 수 있는 투자자처럼 행동하고 있다.

국민연금은 떠날 수 없는 투자자이다. 이 사실을 직시하고 장기투자자로서 투자 기업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한다. 그 동안 너무 방관적이었다. 개인 대주주가 기업가정신이 없는 2ㆍ3세에게 기업을 물려주기 위해 불법과 편법도 마다하지 않고, 기업을 단지 사익 편취의 도구로만 보는 천박한 행태를 보이는 데는 국민연금의 책임도 큼을 자각해야 한다. 공공기관이 공적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이 있음에도 이를 방기하는 것은 권한을 사적으로 남용하는 것만큼이나 큰 잘못이다. 이제 국민연금도 1ㆍ2대 주주의 권한을 행사하여 통상 7ㆍ8명씩인 기업 이사회의 사외이사 1명 정도는 맡아야 한다. 이들을 ‘공익이사’라 칭하자.

“강아지도 자기 밥 주는 주인은 물지 않는다”는 말처럼, 대부분의 사외이사들은 이제까지 대주주가 실질적 임면권을 가졌기 때문에 이들의 잘못된 경영철학에 맞서지 못했다. 그래서 거수기가 되었다. 그러나 동일인이라도 국민연금 추천을 받으면 태도가 달라질 것이다. 보다 사명감을 갖고 전체의 이익을 위해 열심히 일하지 않을까? 국민연금에서 파견된 공익이사들이 우리 기업과 경제를 건강하고 격조 있게 변모시키는 성숙한 모습을 상상해 본다.

세계적으로 많은 기관투자자들이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하여 대리인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고자 하는 추세에 있다. 캘리포니아 공무원 연금(CalPERS) 같은 글로벌 연기금은 개별회사에 대한 투자비중이 커지면 사외이사를 파견해 대주주의 전횡을 감시, 견제하고 있다. 사유재산을 보호하고자 하는 자본주의 일반원칙에 의거한 너무나 당연한 행위이다. 국민연금이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노력한다면, 전 세계 연기금의 모범이 되리라고 확신한다.

노금선 ㈜이오스파트너즈 대표, 전 국민연금공단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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