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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장, 야구장에 ‘맨스플레인’은 더 이상 없다

입력
2016.03.30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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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스플레인(mansplain)’은 ‘남자(man)’와 ‘설명하다(explain)’를 합친 신조어다. 남자가 여자에게 윗사람처럼 굴며 설명하는 행태를 빗댄 말이다. ‘이 여자가 설마 이걸 알겠어’라는 편견과 오만에서 시작되는 ‘맨스플레인’이 자연스럽게 용인됐던 분야가 스포츠다. 축구장이나 야구장 혹은 중계를 보며 여자 친구, 여자 동료, 여자 선후배에게 어깨를 으쓱하며 설명해 본 경험, 한 번씩 있지 않을까. 그러나 남성들이여 이제 입을 닫자. 요즘은 달라졌다. 스포츠를 잘 알고 보는 ‘야잘녀(야구 잘 아는 여자)’ ‘축잘녀(축구 잘 아는 여자)’가 크게 늘었다. 특히 프로스포츠의 주 소비층인 20~30대 젊은 여성을 중심으로 이런 현상이 도드라진다.

FC서울의 홈, 서울월드컵경기장을 찾아 응원하는 여성 팬들. FC서울 제공
FC서울의 홈, 서울월드컵경기장을 찾아 응원하는 여성 팬들. FC서울 제공

#1 프로야구 팬 홍수민(36)씨는 웨딩 전문 플로리스트(꽃을 여러 가지 목적에 따라 보기 좋게 꾸미는 일을 하는 사람)다. 결혼식이 많은 토ㆍ일요일에 일을 하고 월요일에 쉰다. 하루 쉬는 날이 1주일에 딱 한 번 프로야구 경기가 열리지 않는 날이라 못내 아쉽다. 홍 씨는 원래 롯데 자이언츠 팬이었다. 그는 “머리를 많이 쓰는 작전(야구)보다 정공법을 구사하는 공격 야구가 더 맘에 들어서”라고 설명했다. 제리 로이스터(64) 롯데 전 감독은 공격 야구로 큰 인기를 끌었다. 무사 1루에서 번트를 대거나 도루를 시도하지 않고 타자에게 모든 걸 맡기는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롯데는 2010년 말 로이스터 감독과 재계약을 하지 않았다. 2011년 이대호(34ㆍ시애틀 매리너스), 2012년 홍성흔(40ㆍ두산 베어스) 등 줄줄이 거포들과 이별하며 예전의 특징을 잃었다. 홍 씨는 요즘 두산 베어스를 응원한다. “두산 야구는 기동성과 한 방을 두루 갖춰서 재미있다”고 이유를 밝혔다.

# 포항 스틸러스와 광주FC의 K리그 클래식(1부 리그) 개막전이 열린 3월 12일, 포항 스틸야드 경기장에 얼짱 개그우먼 허민(30) 씨가 ‘직관(직접 관전)’을 와 화제를 모았다. 허 씨는 포항의 골수 팬인 동료 개그맨 황영조 씨를 따라 포항에 처음 왔다. 하지만 평소에도 FC서울의 홈 구장인 서울월드컵경기장을 종종 찾는 K리그 팬이다. 최진철(46) 감독을 새로 영입한 포항의 경기력에 대해 묻자 허 씨는 “전술은 감독의 고유 영역이라 말하지 않는 게 낫겠다. 몇 경기 더 봐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우문현답, 고수의 느낌이 묻어난다. 그러면서도 그는 “포항 선수들이 대부분 어리다. 팀의 중심을 잡아줄 베테랑이 없어 아쉽다”고 했다.

#3 직장인 유병호(36) 씨는 지난해 아내 안혜인(31) 씨와 프로야구 중계를 보다가 깜짝 놀랐다. 한화 투수 송은범(32)이 던진 볼이 홈 플레이트 앞에서 한 번 튕겼고 포수 조인성(41)이 가까스로 잡았다. 이어진 2구도 또 원 바운드 볼. 카메라가 짜증 가득한 조인성의 얼굴을 비추자 안 씨가 한마디 했다. “투수가 아무리 폭투를 해도 대놓고 짜증내면 안 되지. 포수의 가장 큰 임무는 투수를 편하게 해주는 건데 말이야.” 유 씨는 마음속으로 감탄했다. 아내가 평소 스포츠에 관심이 있는 편인 줄은 알았지만 저 정도일 줄이야.

프로야구 LG 트윈스의 여성 팬들. LG 트윈스 제공
프로야구 LG 트윈스의 여성 팬들. LG 트윈스 제공

이재호 FC서울 마케팅팀장은 “프로축구의 여성 팬은 20대 초ㆍ중반이 가장 많은데 4~5년 전과 비교하면 여성 팬들의 관전 수준이 크게 높아졌다”며 “과거 여성 팬들은 좋아하는 선수가 이적을 하면 응원하는 팀도 바꾸곤 했다. 하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다. 팀에 대한 충성도가 강한 여성 팬들이 많다”고 설명했다.

프로야구는 2008년 베이징올림픽 금메달, 2009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준우승을 기점으로 여성 팬이 증가했다. 스포츠서울 야구기자 출신인 김정란(34) 씨는 2009년 10월 ‘야구 아는 여자’란 책을 썼다. 스포츠를 함께 공감하고 즐기기를 원하는 여성들을 위한 ‘2030 취향 공감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기획돼 이후 ‘축구 아는 여자’란 책으로 이어졌다. 김 씨는 “몇 년 전만 해도 야구 관련 서적은 대부분 전문적이었다. 야구에 관심은 많은데 규칙을 잘 몰라 궁금해 하는 여성들의 니즈(요구)를 충족하자는 제안을 받아 책을 냈고 실제 반응이 괜찮았다고 들었다”며 “그 때보다 지금은 해박한 야구 지식을 갖춘 여성들이 늘어난 느낌이다. 예전에는 선수 중심의 관전 문화가 강했는데 지금은 야구 자체를 즐기는 여성들이 더 많이 보인다”고 했다.

반면 ‘야잘녀’와 ‘축잘녀’의 증가는 사회 분위기 변화에 따른 착시 현상일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프리랜서 인문교양 편집자인 김정희(33)씨는 “예전 여성들은 스포츠를 잘 모르고 봤고 지금 여성들은 잘 알고 본다는 등식에 동의하기 힘들다”고 이의를 제기했다. 그는 “과거에도 스포츠에 높은 식견을 가진 여성들이 많았다. 처음에 잘생긴 선수 때문에 좋아하게 됐든 다른 이유든 스포츠를 즐기다 보면 알고 싶어지고 공부하기 마련이다”며 “지금 20~30대 여성들은 인터넷이나 SNS(사회관계망서비스) 등을 통해 남성에게 의지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관련 지식을 쉽게 접한다. 여성이 남성에 비해 스포츠에 대해 모를 이유가 뭐가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하지만 과거에는 여성들이 소위 ‘아는 척’을 할 수 없었던 사정이 있었다. 야구장이나 축구장은 남성 중심적인 장소다. 여성이 스포츠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과시하면 여성 비하나 혐오 발언이 쏟아지곤 했다. ‘야잘녀’ ‘축잘녀’를 신기하고 특별하게 바라보는 시선도 여성들에게는 일종의 차별로 느껴질 수 있다. 김 씨는 “이런 게 싫어서 자연스럽게 입을 다문 여성들이 많았다. 요즘 그나마 선입견이 줄어 여성들이 활발하게 의견을 내는 것 아니겠느냐”고 분석했다. 프로축구연맹에서 명예기자 활동을 하는 허지연(덕성여대 4년) 씨는 2007년부터 수원 삼성을 응원한 K리그 팬이다. 그가 처음 축구장에 갔을 때만 해도 남성 팬들은 여성들을 ‘얼빠(얼굴 잘생긴 선수만 따라다니는 여성 팬들을 비하하는 말)’ 취급했다. 허 씨는 “어떤 선수 좋아하냐고 질문해서 백지훈(31ㆍ 한때 꽃미남 선수로 큰 인기를 누림)이라고 답하면 다들 ‘그럼 그렇지’하는 표정을 지었다. 요즘은 그런 일이 별로 없다. 또 예전에는 커뮤니티에 그날 축구 결과를 전문적으로 분석하는 글 대부분을 남성들이 올렸는데 요즘은 여성들도 많아졌다”고 했다.

윤태석기자 sporti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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