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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
소설가

등록 : 2016.03.04 10:46
수정 : 2016.03.04 15:56

[장정일 칼럼] 가능성과 잠재성이 반대말이 될 때

등록 : 2016.03.04 10:46
수정 : 2016.03.04 15:56

일상 언어 속에서 가능성과 잠재성은 큰 구별 없이 사용된다. “그는 스타가 될 가능성이 있어”라고 말할 때, 가능성 대신 ‘잠재성’을 넣더라도 어색하지 않다.

하지만 막상 사전을 찾아보면 두 단어는 미세함 이상의 큰 차이를 갖고 있다. 가능성은 “일이 이루어지거나 실현될 수 있음”을 뜻하고, 잠재성은 “겉으로 나타나지 않고 속에 숨어 있는 성질”을 가리킨다. 그런데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의 사무엘 베케트론인 ‘소진된 인간’(문학과지성사, 2013)을 보면 두 단어는 큰 차이를 가진 유사 용어가 정도가 아니라, 아예 반대어라고 해야 한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것이 가능성이다. 어릴 때 야구를 잘 하던 소년은 초ㆍ중ㆍ고등학교 야구부를 거쳐, 야구부가 있는 대학이나 프로구단에 뽑혀 간다. 종목은 다르지만 피겨나 체조 신동은 올림픽 꿈나무로 자라나고, 피아노와 바이올린 신동 역시 여러 콩쿠르에서 우승을 거머쥔 뒤에 솔로 연주자가 된다. ‘하면 = 된다’인 가능성은 어쩌면 동어반복의 세계라고 할 수 있고, 새로운 생성이나 창조라고는 모르는 불모의 세계이기도 하다. 현역에서 은퇴한 프로 야구 선수가 감독이나 방송사의 야구 해설위원이 되듯이, 모든 신동은 머리 숱이 허옇게 셀 때까지 똑같은 일을 하게 된다.

잠재성이란 콩이 수박이 되고 팥이 감자가 되는 것이다. 콩이 수박이 되고 팥이 감자가 되려면, 먼저 콩이 콩 되는 가능성과 팥이 팥 되는 가능성이 소진되어야 한다. 김연아와 손연재에게는 피겨 선수나 체조 선수가 될 가능성 이외의 숱한 잠재성이 있지만, 그들이 소믈리에가 되고 시인이 되기 위해서는 현재의 가능성이 소진되어야 한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가능성이 시퍼렇게 눈 뜨고 있는 한 잠재성은 발현되지 않는다. 두 사람 속에 숨어 있는 잠재성이 모색되기 위해서는 차에 부딪치거나, 연습 도중에 선수 생활을 포기해야 할 정도의 부상이 있어야만 한다.

자칫 잠재성을 하나의 가능성에서 또 하나의 가능성으로 옮겨가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그 사람은 잠재성을 ‘만약에(If)’로 오해한 것이다. 1차 2차에서 고주망태가 된 취객이 “미아리로 갈까요, 영등포로 갈까요”를 흥얼거리며 갈지자를 그리는 것이 ‘만약에’다. 취객이 갈지자 행보 끝에 미아리의 미스 홍을 안거나 영등포의 미스 배를 안는 것처럼 가볍고 쉬운 것이 ‘만약에’라면, 잠재성은 그것보다 무겁고 어렵다. 콩이 수박이 되고 팥이 감자가 되는 돌연변이가 예사 일이 아닌 것처럼, 차에 부딪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런 뜻에서 잠재성은 사울이 바울이 되는 것, 죽음을 건 단절이나 생명을 건 도약이다.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라면 사건이라고 말할 이런 단절과 도약은 가능하지 않은 것(불가능한 것)을 선택하는 것과 같다.

대통령이 되고 싶어 안달한 사람을 ‘대통령병 환자’라고 하는데, 대통령병 환자를 만드는 것도 빌어먹을 가능성이다. 눈만 감으면 대통령에 당선될 가능성이 어른거리니 당을 깨는 것도, 중도층을 잡겠다고 마구잡이로 우클릭을 하는 것도 괘의치 않는다. 가령 안철수 같은 이가 가능성에 사로잡히지 않았다면, 정권 교체를 위한 더 큰 정치적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었을 것이다.

가능성의 다른 말은 경로의존성이다. 춤만 추면 주위의 주목을 받던 아이는 더 많은 칭찬을 얻어내고자 계속해서 춤추기에 골몰한다. 이 아이는 훗날 비보이(B-boy)가 되거나 걸그룹의 일원이 된다. 문제는 한 번 일정한 경로에 의존하기 시작하면 나중에 그 경로가 비효율적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여전히 그 경로를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가능성은 성취되어봤자 원래 내가 가지고 있던 것이 현실화 된 것에 불과한 것이자, 내가 최종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을 가로 늦게 알게 되더라도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의존하게 만든다. 이와는 반대로 모든 가능성을 소진시킨 베케트의 주인공들은 오히려 “무욕하고 빈틈”이 없으며 무한정한 유희를 행한다. 들뢰즈는 베케트의 주인공들을 절망과 연관 지어온 상투적인 관습과 결별하고, 스스로를 “능동적으로 활성화”하는 잠재성의 발현자들로 예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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