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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협상의 조건과 생존 전략

입력
2017.10.18 14:35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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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안보ㆍ경제구도가 복합적 위기국면으로 접어들면서 새로운 협상과 동맹전략이 되고있다. 협상은 힘과 논리를 동시에 반영한다. 힘은 협상의 기본적 조건을 결정하고, 논리는 전략을 만들어 낸다. 다양한 상대국들 간의 비대칭적 힘의 구도 아래 한국이 협상전략을 만들어 내는 것은 쉽지 않은 도전이다.

얼마 전 한국을 방문한 유럽연합의 전 통상장관은 숱한 협상 경험에서 우러난 한마디를 던졌다. “협상은 상대만큼 강하게 나갈 수 있을 때에만 성립된다.” 절대적 힘이 크지 않아도 협상 대상이 될 결정적 지렛대를 가진다면 협상력이 커진다. 북한의 군사, 경제규모는 미국이나 중국에 상대도 되지 않을 만큼 작지만 핵과 미사일 기술의 확보는 협상에서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해 왔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게 마련이다. 고래들이 부딪칠 때 새우는 재빨리 피하든지 아니면 고래들이 피해가도록 해야 한다. 북한은 분명 새우 급이지만 핵이라는 날카로운 가시와 촉수를 가졌다. 한국은 더 이상 새우가 아니고 돌고래 급은 된다고 자부해 왔지만 초강대국의 파워 게임에서는 몸집이 좀 큰 슈퍼 새우 급에 그친다. 그 생존 무기는 무엇일까? 고래들이 껄끄러워할 가시가 있는가? 더 작은 새우를 압도할 힘이 있는가? 위기 상황을 빠르게 벗어날 속도가 있는가? 아니면 고래들을 설득할 뛰어난 논리를 가지고 있는가? 이 모든 질문에 속 시원히 대답하기는 어렵다.

한반도의 분쟁 예방과 평화 구축이라는 목표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생존이 걸린 문제여서, 우리의 평화 갈망은 어떤 상대국보다 크다. 이러한 절실함과 비장함의 이면에 실제로 상황 해결에 활용할 지렛대가 극히 제한된 현실은 역설적으로 평화 강조가 낭만적으로 비춰지는 상황을 낳았다. 문제는 한국을 제외한 북한, 미국, 중국, 일본 모두가 싸늘한 현실주의적 입장에 서 있다는 점이다.

안보든 통상이든 지금 상황에서 방어전략과 회피전략 모두 먹혀들 여지가 크지 않다. 한국이 무임승차할 환경이 아니고, 새로이 비용을 부담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비용을 낮춰야 하더라도 회피하는 게 능사는 아니다. 그 비용으로 더 큰 안보ㆍ경제적 가치를 만들어 내는 전략적 투자를 하면 그만이다. 또한 공감의 목소리는 크게, 이견 조율은 작은 목소리로 하면서 동맹의 견고함을 확인시키면, 협상에 필요한 레버리지를 밖에서 가져올 수 있다. 상대방의 명분을 세워주면서 최대한의 실리를 확보해야 한다.

이런 실용성의 강조가 무원칙, 무책임을 뜻하는 건 아니다. 실용성이 이념적 변절이나 몰가치로 비춰져서는 안 된다. 실용은 특정 노선이 아니라, 생존 전략의 기본 전제일 뿐이다. 실용적 사고에 근거한 냉철한 생존력이 있어야 평화의 담론이 자리잡을 공간이 생긴다.

명분과 원칙 중심의 국내 정치대립 구도에서 승리하는 것은 난이도가 상대적으로 낮다. 진짜 전장은 밖에 있다. 밖의 전장에서는 잘해야 본전이고, 뺨 맞고 돌아오기 십상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려운 게임을 해야 할 때다. 무한경쟁에서 지정학적 리스크에 발목 잡힌 한국을 진정으로 다독여줄 상대국은 없다. 안보와 과거에 치중하면서 성장동력의 확충에 소홀해서도 안 된다. 혁신과 성장이 잇따르고, 거미줄처럼 얽힌 경제적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어야 한국의 설 땅이 생긴다.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커진 경제력에 걸맞은 협상 레버리지를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군사적 수단이든, 과학기술이든, 경제적 수단이든 스스로를 지킬 힘이 있어야 우리가 바라는 방향으로 해결책을 모색해 볼 여지가 생긴다. 우리는 이제까지 명분의 논리에는 엄격하면서도, 그 실행과정의 전략적 성과에는 지나치게 관대했고, 생존 전략에는 막연히 낙관적이었다. 이 모든 것을 되짚어봐야 한다. 밖에서 매겨지는 성적표는 다를 수 있다.

이재승 고려대 국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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