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입법 주체가 돼 제도를 바꾸자" 여성 정치 참여 끌어낸 멘토

입력
2018.09.10 04:32
수정
2018.09.10 18:25
28면
0 0

[가만한 당신] 아본 프레이저

아본 프레이저는 2세대 페미니즘 운동사에서 가장 온건하고 더딘 진영을 대표했다. 그는 집회ㆍ 시위로 젠더권력에 맞서 싸우기보다 여성 스스로 그 정치의 주체가 되는 것, 직접 법을 고쳐 변화를 제도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정치와 운동의 경계를 넘나든 정치인이자 운동가였고, 여성들의 사회진출을 격려하고 이끈 학자이자 멘토였다. cla.umn.edu
아본 프레이저는 2세대 페미니즘 운동사에서 가장 온건하고 더딘 진영을 대표했다. 그는 집회ㆍ 시위로 젠더권력에 맞서 싸우기보다 여성 스스로 그 정치의 주체가 되는 것, 직접 법을 고쳐 변화를 제도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정치와 운동의 경계를 넘나든 정치인이자 운동가였고, 여성들의 사회진출을 격려하고 이끈 학자이자 멘토였다. cla.umn.edu

여성운동사가 주목하는 페미니즘 2세대 물결의 주역은 아무래도 문제의식과 활동방식이 가장 첨예했던 급진 페미니스트들이지만, 다른 전망 위에서 활동한 이들도 많았다. 사실 그 넓은 저변과 다채로운 스펙트럼이 높고 힘찬 파도를 지탱한 저력이기도 했다. 1968년 출범한 WEAL(Women’s Equity Action League)’이 그 중 하나였다. ‘여성 역량 실현 동맹’쯤으로 옮겨 부를 수 있을 WEAL은, 1967년의 ‘뉴욕의 급진여성들(NYRW)’이 전미여성협회(NOW, 66년 설립)의 미적지근함이 못마땅해 분가했다면 NOW의 뜨거움을 부담스러워하던 이들이 독립해 만든 모임이다. 법률가와 교육자, 행정ㆍ정치인 등 소수 전문직 여성들이 주축이던 WEAL은, 싸워서 쟁취하자던 NYRW나 압박과 설득으로 얻어내려던 NOW와 달리, 여성 스스로 입법ㆍ행정의 주체가 돼야 한다는, 더디지만 근본적인 전망 위에서 활동했다. 예컨대 그들은 격렬한 시위보다 케네디 행정부의 ‘여성지위자문위원회(Commission on the Status of Women)’와 의회의 ‘동등임금법(63)’ 등 일련의 개혁적 조치들에 주목했다. 급진 여성들이 보기엔 배부른 방관자나 젠더권력의 부역자 같기도 했겠지만, 그들은 서로를 비판하고 또 사안별로 협력하면서 세상의 변화를 함께 이끌었다.

WEAL의 창립자 아본 프레이저(Arvonne S. Fraser)는 그 무렵 미연방 하원의원 도널드 프레이저(Donald Fraser, 1924~)의 부인 겸 비서였고, 그가 만든 민주당 의원 부인 포럼의 서기였다. 대학 졸업 후 줄곧 고향 미네소타 주 민주당(1944 농민ㆍ노동자당과 합당해 공식 명칭은 ‘민주농민노동자당 DFL’)에서 활동하며 당 기관지 ‘DFL News’ 편집장과 여러 당직, 지역ㆍ전국 선거캠프를 누벼온 정치인이기도 했다. 그는 직접 겪은 바, 6남매를 낳은 37세의 그도 남편 동의서 없이는 불임시술을 못 받고, 남편 서명이 있어야만 결혼 전 은행 계좌에서 돈을 인출할 수 있는 현실(minnpost.com)에 분노했다. 그 현실을 바꾸려면 법과 제도를 바꿔야 하고, 그러자면 정치를 바꿔야 했다. 그리고, 정치를 바꾸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 여성 스스로 정치를 하는 길이라 여겼다. 2007년 자서전 ‘She’s No Lady’에 아본은 저 60년대를 회고하며 “나는 베티 프리던이 ‘여성의 신비’에서 말한 ‘이름을 붙일 수 없는 문제’가 바로 나의 문제임을 깨달았다. 모든 세대의 여성들, 특히 대학을 졸업한 여성들은 가정과 자녀들로 규정되지 않는, 자신만의 정체성을 원했다. 우리는 누군가의 부속물이 아닌 주체(individuals)이고자 했다”고 썼다.(twincities.com)

‘운동’과 ‘정치’의 전선(戰線)과도 같은 경계를 넘나들며, 이쪽 저쪽의 비판 속에 서로를 잇고 또 이끌며, 여성의 정치ㆍ사회적 진출과 변화의 법제화를 위해 헌신했던 아본 프레이저가 8월 7일 별세했다. 향년 92세.

60년대 말 워싱턴DC 시절의 프레이저. 'Step by Step'이란 제목의 60,70년대 여성운동사 관련 다큐멘터리 영상. cliohistory.org
60년대 말 워싱턴DC 시절의 프레이저. 'Step by Step'이란 제목의 60,70년대 여성운동사 관련 다큐멘터리 영상. cliohistory.org

프레이저는 1925년 9월 1일 미네소타 주 램버턴(Lamberton)에서 태어나 미네소타대를 졸업했다. 농부였던 부모 특히 아버지가 열성 민주당원이어서, 그는 어려서부터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46년 대학 동창(Perry Morgan)과 결혼했다가 3년 만에 이혼했고, 48년 졸업하자마자 존슨 정부의 부통령을 지낸 민주당 정치 거물 허버트 험프리(Hubert Humphrey)의 상원 선거 캠프에 가담했다. 거기서 도널드를 만나 50년 결혼했다. 도널드의 아버지는 하버드 법대를 나와 미네소타대 로스쿨 학장을 지낸 지역 유력자였고, 도널드는 로스쿨을 갓 나온 정치 신인이었다. 아본은 51년 첫 아들(Thomas)을 시작으로 57년까지 거의 연년생으로 5남매를 낳았고, 62년 12월 막내딸(Jean)을 얻었다. 그는 임신-출산을 반복한 그 시절에도 ‘DFL News’ 편집장(54~56년), 당 부의장(56~62), 60년 존 F. 케네디 대선 지역 캠프 부매니저 등을 맡아 동분서주했다.

62년 총선에서 도널드는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됐고, 부부는 6남매를 데리고 워싱턴D.C로 이사했다. 아본은 곧장 도널드의 의원실로 출근하며 ‘페미니즘 지하조직’이란 평을 듣던 의원부인포럼을 조직했고, WEAL을 창립했다. 의원 사무실에서 그는 직무와 상관없이 남성은 상급 입법비서관, 여성은 하급 사무비서관으로 나뉘는 관행을 폐지했고, 의회 수석연락관과 재무담당 비서 등을 모두 여성에게 맡겼다.(people.com) 71년 WEAL 부회장, 72~74년 회장, 76년 WEAL의 여성 인턴 프로그램과 교육ㆍ법률지원 재단 설립…. 외교위 소속이던 도널드를 수행해 유엔을 비롯 세계 각지를 다니면서도, ‘의원 부인’ 신분에 머물지 않고, 현지 여성 포럼 등 다양한 여성 권익 행사를 독자적으로 기획하고 추진했다.

76년 카터-먼데일의 대선 직후, 그는 대통령 직속 자문관 겸 여성 스카우터로 지명됐다.역대 행정부의 여성 인사(人事)가 생색내기(tokenism)에 불과하다는 Now 등의 비판이 거세던 때였다. 77년 5월 ‘People’ 인터뷰에서 프레이저는 정부 고위직(연봉 기준 3만 달러 이상) 여성 비율이 포드 행정부의 3%에서 17%로 늘어났다며 “우리의 목표는 20%”라고 말했다. 그는 “지금껏 역량 있는 수많은 여성들이 ‘올드 보이’들의 네트워크에서 배제돼 아예 보이지 않았다.(…) 이제 변화가 시작됐고, 나는 그 변화가 무척 짜릿하다”고 말했다.

이후 그는 카터 정부의 역점사업이던 해외원조사업 전담기구 국제개발처(USAID)의 여성개발국장(77~81)을 맡았다. ‘여성개발’은 미국 정부가 대외 원조의 조건으로 피원조국 여성의 정치ㆍ행정 참여 및 젠더 격차 해소를 내건 정책으로, 근래에는 ‘젠더 개발(GAD)’이란 용어로 통용된다. 아본 프레이저는 저 정책 개념의 입안자 중 한 명이자 원년 리더였다.

미국 정치인의 아내로서 도드라진 이력을 남긴 이들로는, 남편보다 더 위대했다는 평을 듣기도 하는 엘리너 루스벨트(1884~1962), 낙태와 성평등 임금의 전투적 옹호론자였던 베티 포드(1918~2011) 등이 꼽힌다. 각료회의에 적극적으로 배석해 정책 결정에 개입했던 로절린 카터, 지금도 “만인의 할머니”라 불리는 여걸 바버라 부시, 낙태 문제 등을 두고 남편과 공공연히 맞섰던 로라 부시와 근년의 미셸 오바마도 있다. 그들은 모두 퍼스트레이디였다. 반면 워싱턴 정가 상ㆍ하원 의원의 부인들은 주목 받을 일이 드물다. 오히려 정치인의 아내는 남편의 조력자로서, 스스로 도드라지지 않으려고 몸을 사리는 경향이 지금도 있다고 한다. 대선 직전이던 2012년 8월, 공화당 하원의원 토드 아킨(Tod Akin)이 한 방송 인터뷰에서 반(反)낙태의 소신을 피력하며 ‘진짜 강간(legitimate rape)’이면 여성의 몸이 본능적으로 닫혀 임신할 확률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은 일이 있었다. 그 즈음 뉴욕 여성잡지 ‘The Cut’이 양당의 여성관, 특히 공화당이 미트 롬니-폴 라이언의 부인 앤 롬니-재너 라이언의 ‘미덕’을 홍보한 문구들을 꼬집는 특집 기사를 썼다. ‘soft-spoken’ ‘always in good humor’ ‘quiet, gracious and comfortable’ 등등이 키워드였다. ‘The Cut’은 미셸 오바마의 개혁적 열정과 활동성, ‘박사 Dr.’ 칭호를 고집하며 “나는 내 돈, 내 정체성, 내 자신의 커리어를 원한다”는 소신을 밝혀온 조 바이든의 부인 질 바이든(Jill Biden)을 대비했다. 그리고, 공화당 강세지역인 4개 주(아칸사스, 와이오밍, 아이다호, 네바다주)의 이혼율이 미국 내 1~4위라는 2008년 조사 자료를 의미심장하게 덧붙였다.(thecut.com)

아본-도널드 프레이저 부부는 삶과 정치에서 "두 개의 트랙을 따로 달린 하나의 팀"이었다. 그들 부부에겐 내조-외조가 따로 없었다. AFSCME Council 5, hhh.umn.edu
아본-도널드 프레이저 부부는 삶과 정치에서 "두 개의 트랙을 따로 달린 하나의 팀"이었다. 그들 부부에겐 내조-외조가 따로 없었다. AFSCME Council 5, hhh.umn.edu

1971년 뉴욕타임스는

상ㆍ하원 의원 부인들의 삶의 우울한 면들을 조명하는 기사를 썼다. 임대료 비싼 워싱턴D.C에서 집을 구하는 일부터, ‘독박 육아’와 아이들 전학시키기, 연중 200여 차례에 달하는 이런저런 행사에 남편과 함께(혹은 대신) 참석하기 등등…. 한 의원 부인은 낯선 동네에서 남편 얼굴조차 보기 힘든 일상을 견디느라 첫 석 달 동안 거의 매일 울었다고 말했고, 사생활과 프라이버시가 사라져버린 허전함을 견디기 힘들었다고 고백한 이도 있었다. 다른 인터뷰에서 아본 역시 지역 정치무대에서 쌓아온 자신의 경력 단절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었고, 인적 없는 교외 생활의 낯섦과 허전함을 토로한 적도 있었다. 워싱턴 살이 8년차였던 71년 인터뷰에서 그는 다른 이들과 달리 “나는 (교외보다) 의사당 근처가 좋다”고 말했다. 출퇴근도 편하고 사람도 일거리도 널려 있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은 백인 사립학교 대신 대부분 흑인 학생인 특별구 공립학교에 다녀야 했지만, 그는 “아이들이야말로 편견이 없고, 그런 환경이 그들에게도 좋다”고 말했다. 두 아들이 조간신문 배달을 해서 모은 돈으로 휴가 여행이라고 가면 부부가 대신 새벽에 신문을 배달하곤 한다는 일상도 소개했다. 그의 자서전에는 69년 아본이 의원 부인들을 초대해 담소하는 일종의 ‘의식고양모임’ 을 이끈 이야기가 나온다. 그가 정한 발언 규칙은 절대 ‘내 남편이…’로 말문을 열어서는 안 된다는 거였다.

프레이저 부부의 정치적 입장은 더러 엇갈렸다. 76년 대선 프라이머리에서 아본은 카터를 도왔고, 남편 로널드는 자신의 정치 멘토인 험프리를 지원했다. 카터의 백악관 당선 만찬에는 아본만 초대 받았고, 도널드는 배우자 자격으로 참석했다. 도널드는 거기서 만난 한 동료 의원에게 “내가 왜 왔냐고? 내 아내가 명사(somebody)거든”이라고 말한 적도 있었다. 도널드는 16년(1963~79) 하원의원 시절 동안 각종 인권법안 제정에 기여했고, 베트남전쟁에도 앞서 반대한 의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부통령이 된 험프리의 상원 의석을 물려받기 위해 78년 하원 의원직을 내놓았다가 “아본의 조력 없이 처음 치른” 당내 경선에서 기업가 출신 보수 후보(Robert Short)에게 패배했다. 그리고 이듬해 미니애폴리스 시장 선거에 출마, 93년까지 13년간 시장으로 일했다. 여성개발국장이던 아본은 자신의 임기를 마친 뒤에야 미니애폴리스로 내려왔다.

81년 6월, 그는 워싱턴D.C 16년을 마감하며, 여성단체 후원금 모금행사를 겸한 고별연을 열었다. 참석자 중에는 그가 직ㆍ간접적으로 간여한 10여 개 여성단체 회원만 100여 명에 달했다. 두 딸을 각각 교통사고와 자살로 여읜 일부터 분주했던 여러 활동을 회고하며 그는 맨 먼저 남편에게 고마움을 피력했다. “도널드의 한결 같은 지지가 없었다면 나는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다. 가끔 나는 우리가 그들(남편들)에게 고마움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하고 산다는 생각을 한다. 그들은 존중 받을 만한 사람들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추구할 이상(cause)이 있고, 함께 해준 당신들이 있어서 나는 줄곧 나아갈 수 있었다.”(washingtonpost.com)

귀향 후 그는 모교 미네소타대 험프리스쿨의 선임연구원으로서, 자신의 인맥과 영향력을 밑천 삼아 85년 ‘여성, 젠더, 공공정책센터’를 설립했다. 각 분야의 젠더 차별 실태를 조사ㆍ연구하고 청년 여성들을 교육하고 그 성과를 공공정책에 반영하는 미국 최초 학제통합 젠더 교육ㆍ연구ㆍ정책과정이었다. 주 의회 의원들과 지역사회 단체 지도자 등이 거기 동참했다. 그렇게 그는 여성들의 멘토로서 그들이 사회로, 의회와 정부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개척했다.

2015년 9월, 프레이저의 90세 생일 축하하며 험프리스쿨이 주최한 포럼에서 아본 프레이저는 ‘‘미완의 과업(Unfinished Business)’이란 제목으로 연설했다. 여전히 만연한 성희롱과성폭력, 직장내 불평등과 취약한 여성의 경제적 안전망, 그리고 아직 경제활동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여성의 가사노동 현실을 그는 숙제로 꼽았다. 그는 변화의 핵심 동력은 대화와 정치 참여라고 강조했다. “친구, 직장 동료, 이웃과 어떤 문제와 해법에 대해 대화하는 것 자체가 여론을 형성하고 변화시키는 힘입니다. 그리고 모든 선거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미혼여성 35%가 여전히 유권자 등록을 하지 않고 있는 현실은 위험합니다. 투표하지 않는 것은 타인에게 당신의 결정을 맡겨버리는 것입니다. 지난해 선거에서 여성 유권자 65%(남성은 61%)가 투표한 건 물론 고무적이지만, 60%대 투표율은 미흡합니다.”

2007년 펴낸 자서전 'She's No Lady'. 그는 'Lady'란 경칭으로 불리는 정치인의 아내이기 이전에 스스로 정치인이었다.
2007년 펴낸 자서전 'She's No Lady'. 그는 'Lady'란 경칭으로 불리는 정치인의 아내이기 이전에 스스로 정치인이었다.

주요 선거가 있을 때마다 지역 언론들은 아본의 입장을 따로 묻곤 했다. 2008년 대선 프라이머리 직전 그는 예상을 뒤엎고 오바마를 공개 지지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힐러리 잘 알고, 무척 좋아합니다. 여성 대통령이 필요하다는 것도 압니다. 하지만 지금 미국은 더 큰 변화, ‘부시-클린턴-부시-클린턴’ 보다는 더 위대한 변화가 필요합니다.(…) 물론 힐러리가 후보가 된다면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그를 도울 것입니다.”

99년 독립당 후보로 미네소타 주지사가 된 제시 벤투라(Jesse Ventura, 현재는 녹색당)가 주 퍼스트레이디인 아내(Theresa Masters)에게 급여를 지급하겠다고 선언해 논란이 일던 무렵, 벤투라를 앞장서 변호한 이가 ‘16년 무급비서’ 경력자인 아본 프레이저였다. 그는 벤투라에게 편지를 썼다. “오랫동안 공직자의 아내로 살아온 나는, 당신의 판단이 무척 멋지다고 생각하며 열렬히 지지한다. 당신에게 투표하진 않은 걸 ‘거의’ 후회할 지경이다”(startribune.com)

현재 미네소타의 연방 상원의원은 둘 다 민주당 여성 정치인이다. 2007년부터 연임해온 에이미 클로버샤(Amy Klobuchar, 1960~)는 “아본은 수많은 여성들을 이 싸움터(정치판)에 불러 넣어 멋지게 싸우게 해준 내 이웃이자 친구”라고 자신의 트윗에 썼고, 부지사를 거쳐 올 1월 초선 임기를 시작한 티나 스미스(Tina Smith, 1958~)는 “아본은 나를 비롯한 수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소신을 위해 비타협적으로 싸울 수 있도록 용기를 주었다. 아본 덕에 그의 주변뿐 아니라 이 세상이 더 나아졌다”고 애도했다.

자서전 제목(She’s No Lady)처럼 그는, ‘레이디’나 ‘의원 부인’이 아닌 ‘아본 프레이저’였다. 그의 페미니즘 2세대 물결은 아직 멈추지 않았다. 최윤필 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