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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핀란드 내전(5.15)

입력
2018.05.15 04:4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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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전과 그 직후 백핀란드가 운영한 포로수용소 중 한 곳. 남부 라흐티(Lahti)의 헨날라수용소.
내전과 그 직후 백핀란드가 운영한 포로수용소 중 한 곳. 남부 라흐티(Lahti)의 헨날라수용소.

100년 전 오늘(1918. 5.15), 핀란드 내전이 끝났다. 1917년 12월 러시아제국으로부터 독립한 뒤 중ㆍ북부 우파 백핀란드와 남부 사회주의 적핀란드가 치른 내전은 1918년 1월 27일 시작돼 100일 남짓 동안 당시 인구의 약 1.2%인 3만6,000여명의 생명을 앗아갔다. 전투 희생자보다 테러와 처형, 포로수용소에서 질병과 굶주림으로 숨진 이들이 더 많았다. 이념ㆍ계급 갈등과 내전의 앙금은 2차 대전 이후까지 지속됐다. 오늘날 인구 500만명의 북유럽 복지 강국 핀란드의 100년 전, 60년 전이 그러했다.

12세기 이래 스웨덴 치하에 살다가 나폴레옹 전쟁 직후인 1809년부터 러시아의 지배를 받은 핀란드(당시 대공국)는 인근 러시아 수도 페트로그라드의 후방효과와 자체 광물ㆍ임산 자원 덕에 상대적으로 빨리 산업화했다. 하지만 차르 체제 하의 경제성장은 전통 신분제에 더해 노동ㆍ귀족 계급의 경제적 양극화를 심화했다. 노동계급이 성장하면서 사회주의 진영도 두꺼워졌다. 친 러시아 슬라브주의와 스칸디나비아-핀족의 민족주의, 서유럽 계몽-자유주의와 공국 체제의 왕정주의 등 이념ㆍ체제의 갈등이 극심했다.

그 갈등이 권력ㆍ치안 공백기에 이념적으로 조직된 민병대를 앞세워 무력 충돌했다. 수도 헬싱키를 중심으로 산업과 임업이 발전한 남부지역이 적군의 거점이었고, 중ㆍ북부는 백군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 백군에는 슬라브 팽창주의를 경계한 독일제국과 독일서 훈련받은 군대, 1차대전서 경험을 쌓은 군 지휘관들이 있었다. 적군의 배후에도 러시아가 있었지만 혁명 직후의 러시아 군대는 별 힘이 되지 못했다. 전투는 백군이 우세했다. 독립 전부터 이어진 양측의 테러는 내전 중 극에 달했고, 내전 직후인 18년 5월의 경우 백색테러로 약 5,000명이 숨졌다.

2차 대전 전후 소련과의 2차례 전쟁과 냉전기를 거치며 북유럽 약소국 핀란드가 복지 선진국으로 거듭난 데는, 한국의 ‘국부(國父)’와 사뭇 대조적인, 헌법학자 출신의 초대 대통령 카를로 스톨베리와 그가 주도해 만든 헌법, 비례대표제-혼합 정부 형태의 입헌 민주주의 덕이 컸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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