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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전교 1등이 없다면

입력
2017.11.15 19:0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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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예비소집일인 15일 대전 동산고등학교에서 한 선생님이 하교하는 3학년 수험생을 안아주고 있다. 연합뉴스
2018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예비소집일인 15일 대전 동산고등학교에서 한 선생님이 하교하는 3학년 수험생을 안아주고 있다. 연합뉴스

이탈리아 출신 방송인 알베르토 몬디는 한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이탈리아에는 전교 1등이란 개념이 없어요. 다른 사람 성적도 당연히 모르죠. 그래서 자기가 좋아하고 잘하는 일에 집중하는 편이에요…(중략)… 한국에서는 결혼할 때도 직업이나 연봉, 집안을 보는 사람들이 꽤 많더군요. 친구를 사귈 때도 사회적 지위가 비슷한 사람끼리 주로 어울리는 것 같아요. 이탈리아는 친구를 사귀거나 결혼을 할 때 그런 조건을 덜 보는 편이에요. 친구들도 직업이나 연봉이 제 각각이고요.”

한국의 ‘평범한 고교생’이었던 나는 불행히도 친구들의 성적이 구구단처럼 자동반사적으로 떠오른다. 피구를 잘해서 우리반의 자랑이었던 친구, 피아노곡 ‘야생화’를 멋지게 연주하던 친구, 반 체육부장 자리에 대한 책임감이 강해 소풍날도 체육복을 입고 왔던 귀여웠던 친구…. 그 추억들도 성적이라는 꼬리표로 오염되는 기분이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막는 것, 비교를 통해 친구들을 등급화하고 내심의 우월감과 모멸감을 주는 것. 인식하지 못했을 뿐 이것은 정신의 자유를 억압하는 일종의 주술이며, 트라우마이다. 성인이 돼 사회와 인간을 보는 눈을 넓히려는 노력은 이 트라우마를 깨려는 내면의 투쟁으로부터 시작한다.

우리 안의 괴물들은 어느 날 갑자기 표면화한 것이 아니라, 초ㆍ중ㆍ고교의 교육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생각이 요즘 많이 든다. ‘서열의 매트릭스’에서 교육 받은 국민들이 성인이 되어 갑자기 상호존중의 문화를 만들 리는 만무하다. 잊을 만하면 불거져 나오는 충격적인 갑질의 형태들, 쓸모 있는 사람, 쓸모 없는 사람, 함부로 대하면 안 되는 사람, 함부로 대해도 되는 사람이라는 계층간 칸막이와 적대 문화는 우리 교육이 만들어 놓은 사생아가 아닐까. 성적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일을 하는 연예인조차 명문대를 나왔을 경우 어리둥절한 후광을 입는 경우를 보면, 우리 서열문화는 참 쓸 데도 없이 세심하게도 퍼져 있는 것 같다. 이런 교육이 엄청난 인재라도 만들어 낸다면 모르지만,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유럽 선진국 체류를 경험한 사람들에게 자주 듣는 말 중에 하나는 그 곳은 식당 서빙을 해도 자부심을 가지고 한다는 점이었다. 위아래가 아니라, 그저 같은 가치의 인간이 병렬된 사회. 우리의 교육 시스템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인식의 지평이다.

역사적으로 서열화, 등급화는 지배계급의 편리한 통치 수단이었다. 하워드 진의 ‘미국민중사’를 보면, 17세기 미국에서 흑인들과 백인하인들은 함께 일하고 주인에게 공동의 적대감을 가지며 형제처럼 지냈다. 이들의 동질감(공동의 저항)을 깨기 위해, 지배계급은 흑인과 백인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금지하는 법을 만들고 백인이라면 누구나 흑인보다 우월하다고 선언했으며, 백인 하인들에게 금전적 은전을 베풀었다. 지배계급을 위한 노예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 인종주의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또 노예들을 밭에서 일하는 노예와 조금 더 특권을 누리는 가내노예로 나눔으로써 그들 사이의 연대감을 파괴했다.

우리나라 일부 노동자들은 스스로를 ‘노예’라고 자조적으로 칭하기도 한다. 사실 국내에서 더 이상 전체 노동자들의 연대는 없다. 높은 임금뿐 아니라, 노동계를 대표하는 주요 권력까지 쥔 것은 정규직들뿐이다. 서열주의 교육의 사생아들은 노동시장에서도 그 전공을 발휘하며, 좋은 일자리는 독점되고 이 바늘 구멍에 들어가기 위해 교육은 더욱 경쟁으로 치닫는다.

문재인 정부는 ▦자율형사립고ㆍ외국어고 폐지 ▦고교학점제 도입 ▦수능 절대평가 검토 ▦국립대 통합 네트워크 추진 등의 공약을 내걸었고 이미 일부 추진하고 있다. 공공기관 블라인드 채용까지 더해, 서열주의를 타파하려는 정책들이다. 이 정책들의 성패는 얼마나 공정성을 담보하는 대안들이 만들어지느냐에 달리겠지만, 설령 유명 자사고의 전교 1등 학생의 학부모라도 이 제도들이 추구하는 방향과 목표 자체는 한번 생각해보길 바란다. 올해 수능일에는 아침 출근 길에 “수험생 여러분 모두 시험 잘 보세요”라는 라디오 디제이의 멘트를 안 들었으면 좋겠다. 모두 시험을 잘 봐도, 이미 정해진 수의 사람만 얻을 수 있게 설계된 사회가 아닌가. 위선은 지겹다.

이진희 정책사회부 기자 rive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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