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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의 한 세기가 끝났다” 슬픔에 잠긴 영화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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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의 한 세기가 끝났다” 슬픔에 잠긴 영화계

입력
2018.04.17 16:54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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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희씨 빈소에 원로들 잇달아

배우 신영균 “한국 영화 뿌리였다”

염수정 추기경도 “삶의 열정 가득”

16일 오후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배우 최은희씨 빈소에 생전 환하게 웃고 있는 고인의 사진이 놓여 있다. 연합뉴스
16일 오후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배우 최은희씨 빈소에 생전 환하게 웃고 있는 고인의 사진이 놓여 있다. 연합뉴스

“최은희님께 신상옥 감독님도 하늘나라에 있으니 곁에 가서 함께 영화 만들라고 했어요, 저도 곧 갈 테니 좋은 영화 만들자고요.”

원로 배우 신영균(90)씨는 17일 최은희씨의 빈소를 다녀온 직후 한국일보와의 전화통화에서 “한국 영화의 든든한 뿌리였는데...”라며 오랜 동료의 별세를 안타까워했다.

신씨는 ‘상록수’(1961)를 비롯해 ‘빨간 마후라’(1964), ‘저 눈밭에 사슴이’(1969) 등에 최씨와 함께 출연하며 1960년대 한국 영화 르네상스를 이끌었다. 최씨와 가장 많은 작품에서 호흡을 맞춘 남자 배우라는 신씨는 지난달 최씨 병문안을 갔을 정도로 그를 오랜 세월 옆에서 지켜봤다. 신씨는 “최은희님은 후진 양성을 하며 영화계를 위해 참 많은 애를 썼던 분”이라고 했다. 최씨가 1960년대 안양영화예술학교(현 안양예고) 교장을 맡아 후학을 길렀던 일에 대한 언급이었다.

이날 빈소를 찾은 이장호 감독(73)도 본보에 “저 결혼할 때 주례 서준 분인데”라며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이 감독은 최씨와 신 감독이 이끈 영화사 신필름에 1965년 연출부로 입사해 최씨를 처음 만났다. ‘별들의 고향’과 ‘바람불어 좋은 날’ 등을 연출한 이 감독은 “최 선생님은 당시 여왕적 카리스마가 있으면서도 감독인 내게 어머니 같은 존재였다”며 “최 선생님이 돌아가셔 한국영화의 한 세기가 끝났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최씨는 지난 11일 신 감독의 12주기 추모식이 열린 지 닷새 만인 16일 지병으로 별세했다. 이를 두고 이 감독은 “두 분은 숙명의 동반자였던 것 같다”라고도 했다.

최씨의 빈소가 차려진 서울 강남구 성모병원 장례식장은 차분했다. 주로 원로 영화인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김동호(81) 전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은 “신 감독과 최은희 두 분의 기념관을 짓는 게 소원이었는데 보지 못하고 가셔서 안타깝다”고 아쉬워했다. “내가 신필름 막내”라는 배우 한지일(71)은 “최 선생님께서 북한을 탈출해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머물 때 만난 적이 있다”며 “ ‘스타가 돼도 겸손하라’고 조언해주셨던 분”이라며 눈물을 글썽였다.

신 감독과 한국 영화 중흥기를 이끈 최씨의 별세에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은 이날 “최은희 소화 데레사님의 선종에 깊은 애도를 표하며, 영원한 안식을 빈다”며 “삶에 대한 열정이 가득했던 고인은 영화 속 변화무쌍한 역할을 통해 다양한 삶의 방식을 보여주신 분으로 기억한다”고 애도의 메시지를 전했다. 92세에 세상을 떠난 최씨는 생전에 천주교 서울대교구 한마음한몸운동본부의 홍보대사로 사후장기기증과 생명의 소중함을 전파했다.

최씨의 장례는 유족의 뜻에 따라 가족장으로 진행됐다. 최씨의 아들인 신정균씨는 “영화인장으로 치러야 한다는 영화계 의견이 많았지만 어머님 생전 뜻에 따르기로 했다”고 밝혔다. 발인은 19일 오전, 장지는 경기도 안성 천주교공원묘지다.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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