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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시스 게리 파워스

입력
2017.02.10 0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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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2.10

1950년대 말 미국 첩보기 U-2를 조종하다 소련의 포로가 된 프랜시스 파워스.
1950년대 말 미국 첩보기 U-2를 조종하다 소련의 포로가 된 프랜시스 파워스.

스티븐 스필버그의 2015년 영화 ‘스파이 브릿지’로 알려진, 냉전시대 소련 첩보원 루돌프 에이블(Rudolf Abel, 1903~1971)과 미국 CIA U-2 첩보기 조종사 프랜시스 게리 파워스(Francis Gary Powers, 1929~1977)의 포로 교환이 1962년 2월 10일 동독 베를린 글리니케 브릿지(Glienicke Bridge)에서 이뤄졌다.

영화가 보여주듯, 그 전후 사건의 주인공은 단연 포로 교환을 성사시키는 데 큰 공을 세운 미국 변호사 제임스 도노번(James Donoban, 1916~1970)과 사형 선고에도 끝내 스파이로서의 자존심과 인간의 존엄을 잃지 않았던 에이블이었다. 파워스의 존재감은 영화에서도 현실에서도 그리 크지 않았다. 포로 교환이 이뤄지던 그 날, 파워스의 심정은 어쩌면 착잡했을 것이다.

그는 CIA 첩보원 지침을 지키지 못했다. 그가 몰던 비밀 병기 U-2 첩보기의 성능과 재원이 적국에 노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는 지대공미사일 공격으로 비행이 불가능해지자마자 기체와 함께 자폭했어야 했다. 적어도 자신은 기밀 유지를 위해 사전에 지급받은 극약을 먹었어야 했다. 그는 작전에 실패했고, 비겁하기까지 했다. 미국이 포로가 된 그를 구한 것은,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어디까지 군사 기밀을 누설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파워스는 켄터키주 젠킨스의 탄광촌 광부의 6남매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아들이 자신처럼 광부로 늙지 않도록 아버지는 그에게 공부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그는 테네시주 밀리건 대학에 진학했다. 그리고 50년 6월 미 공군에 입대했다. 그의 비행 기술은 탁월했고, 그 덕에 56년 1월 CIA에 발탁됐을 것이다. 그는 석 달 뒤 결혼했고, 대위로 예편해 민간인 신분으로 U-2 첩보기 조종 훈련을 받았다. 소비에트의 방공망이 미치지 못하는 21km 고도를 비행하며 최첨단 영상장비로 적국의 군사기지 등을 정밀 촬영하는 임무. 56년 9월부터 60년까지 이어진 U-2첩보작전은 소련과 중동뿐 아니라 프랑스, 영국, 수에즈위기 당시의 이스라엘 등 우방국을 대상으로도 이뤄졌다. 그는 60년 5월 1일 소비에트 영공에서 지대공미사일에 격추됐지만 “탈출의 희망을 놓지 못해”살아남았다.

포로교환으로 풀려나기까지 그는 1년 9개월 10일을 모진 고문을 받으며 버텼다. 그리고, 그 역시 U-2의 비행 고도 등 1급 군사기밀을 끝내 누설하지 않았다. 최윤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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