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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화장실 명언 앞에 서서

입력
2018.02.09 15:36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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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화장실마다 예쁜 액자를 걸기로 했다는 공고문이 붙은 건 6개월 전이었다. 입주자 대표회의에서 누군가 안건을 냈고, 그게 통과된 모양이었다. 나는 쓸데없이 설렜다. 어떤 작가의 그림이 우리 7층 화장실 액자에 담길까?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이 라이카 카메라로 찍은 흑백사진이 걸리면 더없이 좋겠다며 입맛을 다시기도 했다. 그로부터 보름쯤 지난 오후였다. 졸린 눈을 끔벅이며 화장실로 들어서다가 깜짝 놀랐다. 형광 빛 도는 연두색으로 풀밭을 묘사한 그림 한 점이 알루미늄 액자에 담겨 핸드 드라이어 상단에 고정돼 있었다. 생뚱맞은 그림 아래 박힌 찰리 채플린의 경구가 도드라졌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 우라질! 지금 내 심정이 딱 그 꼴이라네.

난처했다. 백색 톤 화장실에서 저 홀로 화려한 존재감을 뽐내는 액자를 외면할 재간이 내게는 없었다. 위치 또한 절묘해 볼일을 본 뒤 씻은 손을 말리자면 매일 두세 번은 액자와 눈을 마주쳐야 했다. 그런데 이상도 하지. 그때마다 나도 모르게 채플린의 경구를 웅얼거리고, 오래 전 읽은 소설 하나가 떠오르는 거였다. 덴마크 소설가 마틴 넥쇠가 쓴 ‘종신형(LIfe Sentence)’이라는 소설이다.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비극적 세계관을 지녔던 남자. 주인공 마티스는 바닷가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젊고 혈기왕성한 부부에게 신이 내려준 축복이 아니라, 나이 마흔을 훌쩍 넘겨 아이를 기대조차 못했던 부부에게 어쩌다 생긴 늦둥이 외아들. 문제는 마티스가 늙은 부모 아래 세상에 나온 자신의 태생 자체를 평생의 짐으로 규정한다는 거였다. 모든 부모는 아이가 위험한 놀이에 휘말리지는 않을까 경계한다. 매서운 폭풍 몰아치는 바다에서 배를 타기보다 벽으로 둘러쳐진 안전한 교실에서 수학과 시를 공부하길 바란다.

마티스의 부모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늙은 부모의 기대와 애정은 소년을 옭죌 뿐이었다. 견진례를 마치고 아동 시기가 끝났음을 알리는 촌구석 목사의 축사가 내려지는 바로 그때, ‘불평 많은 아버지와 걱정스러운 암탉처럼 꼬꼬댁거리는 어머니의 잔소리’가 닿지 않는 곳으로 훌훌 떠나리라. 그럼에도 마티스는 늙은 아버지의 눈에 맺히는 눈물을 외면하지 못했다. 손바닥만한 비탈밭을 일구는 농부로 주저앉은 그에게 의무와 자기희생은 본성처럼 자리잡았다. 다만 차곡차곡 쌓인 절망감이 그의 삶을 짓눌렀다.

그는 점점 완고하고 야멸찬 사람으로 변했다. 아들 한스가 태어났으나 싸늘하고 엄격한 훈육자에 머물렀다. 어느 날 헛간에서 맷돌을 돌리는 한스의 목덜미를 마티스가 움켜쥐자 아이는 겁에 질린 눈으로 비명을 질렀다. 그 순간 마티스는 보았다. 겁에 질린 눈동자와 비명 소리, 그건 지난날 자신의 모습에 다름 아니었다. 분노와 절망감으로 쌓아 올렸던 벽이 한 순간 허물어지고, 마티스는 아들을 품에 안았다. 난생 처음 느끼는 충만감이었다.

비극으로 끝날 것만 같던 마티스의 삶에도 따스한 햇살이 비쳤다. 무럭무럭 크는 아들과 함께 하는 모든 순간이 그에겐 보람이고 자유였다. 소설은 마티스가 잘 자란 아들을 배에 태워 떠나 보내는 아릿한 장면으로 끝난다. ‘그는 이제 감옥으로 돌아왔다, 돌아본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오래도록 잊히지 않은 이 소설의 결말을 곱씹으며 나는 우리 삶이 채플린의 관점과 반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멀리서 보면 비극이지만 들여다볼수록 기쁨인…. 이 정도면 화장실 액자의 효용가치가 크다며 고개를 끄덕일 무렵 그림과 경구가 쓰윽 교체되었다. 이번엔 상파울의 글이다. ‘인생은 한 권의 책과 같다. 어리석은 이는 그것을 마구 넘겨버리지만 현명한 사람은 열심히 읽는다. 단 한 번밖에 읽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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