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보 사상 첫 은메달 쾌거...3위 달리다 45km서 日선수 제쳐
10년전 아테네 올림픽선 꼴지..."포기란 없다" 한 길 걷고 또 걸어
한국, 경보 3종목에서 모두 메달
서울에서 수원까지 거리는 약 45㎞. 자동차로도 1시간은 달려야 한다. 하지만 이보다 5km 더 먼 50㎞를 쏜살같이 걸어간 남자가 있다. 축지법(縮地法)을 쓴 듯 3시간49분15초 만이다. 50㎞ 경보에서 한국에 아시안게임 사상 첫 메달을 안긴 박칠성(32ㆍ삼성전자)이 주인공이다. 그는 1일 인천 연수구 송도센트럴파크에서 열린 인천 아시안게임에서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다니 다카유키(3시간40분19초ㆍ일본)가 금메달을 가져갔다. 그러나 40㎞ 지점까지 3위를 달리던 박칠성은 45㎞ 지점부터 2위 야마자키 유키(일본)를 제치며 근 4시간의 사투 끝에 역전극을 완성했다.
말이 걷는 것이지 경보는 일반인들이 뛰는 것보다 휠씬 빠른 속도의 레이스다. 특히 50km 경보는 ‘가공할 거리’탓에 여자부에선 아직 도입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모든 스포츠에서 금녀의 벽이 허물어지고 있지만 50km 경보만큼은 거친 남성들의 세계로 남아있다.
박칠성은 2011년 대구 세계육상선수권에서 3시간47분13초의 한국 신기록으로 7위에 오르며 한국 경보의 대들보로 떠올랐다. 이듬해 런던 올림픽에서는 3시간45분55초(13위)로 자신의 한국 기록을 또 경신했다. 한국 신기록 보유자이자 아시안게임 메달리스트로 우뚝 서기까지 그도 처음엔 꼴찌로 출발했다. 첫 메이저대회 출전이었던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남자 20㎞ 경보에 나선 박칠성은 완주한 41명의 선수 중 가장 늦게 결승선을 통과했다. 이날 실격을 당한 선수는 7명이었다. 당시 미국 스포츠 전문 주간지 스포츠일러스트레이티드는 “무더위 속에서 끝까지 완주한 아름다운 꼴찌”라고 박칠성을 소개 했다. 중도 포기할 법도 했지만 박칠성은 당당한 꼴찌를 택했다. 자신을 채찍질하는 밑거름이 됐다. 이후 박칠성은 인천 아시안게임만을 목표로 걷고 또 걸었다. 지난해 5월 발등 부상의 고비가 있었지만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리고 이날 최하위로 레이스를 마친 중국의 장린(4시간8분5초)에 18분 50초나 앞서 결승선을 통과했다.
박칠성은 “한국 육상도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부상을 이기고 재기하려 노력했다”고 말했다.
‘지옥의 레이스’로 불리는 장거리에, 오리걸음처럼 뒤뚱거리는 모양새로 비인기 설움을 받아 관중이 별로 없던 이날 경기에 박칠성의 부모님과 아내, 그리고 세 자녀가 찾아와 응원의 함성을 보냈다. 박칠성은 “부모님이 오시면 경기가 잘 풀리지 않는 징크스가 있어서 늘 오시지 말라고 하는데 오늘은 왜 오셨는지 모르겠다”고 하면서도 “오늘은 그 징크스가 깨진 것 같다”고 미소를 지었다. 박칠성의 고향은 전남 영암. 그의 부모는 여전히 그곳에서 농사를 짓는다. 원래 육상 중장거리 선수였던 박칠성은 고2때 경보로 전향했다. 운동 선수를 탐탁지 않게 여겼던 아버지는 “운동해서 먹고 살 수 있겠냐”며 핀잔을 줄 정도로 애정 표현에 인색했지만 지금은 누구보다 든든한 아들의 후원자가 됐다.
박칠성은 “금메달을 따내, 한국 육상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는데, 내 몸이 은메달밖에 되지 않았다”면서 “3시간 41분대 선수와는 역시 기록 차이가 있었다”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박칠성을 지도하는 이민호(50) 삼성전자 코치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경보의 길을 묵묵히 걷던 것 만으로 박칠성이는 금메달 이상의 존재 의미가 있다”고 대견해 했다.
한편 남녀 20㎞ 경보에서 김현섭(29)과 전영은(26)이 동메달을 수확했고, 50㎞에서 박칠성이 은메달로 레이스를 끝낸 한국 경보는 아시안게임 사상 최초로 경보 3개 부문 모두 메달을 획득하는 쾌거를 이뤘다.
인천=성환희기자 hhs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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