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양승준 기자

등록 : 2017.10.01 13:41
수정 : 2017.10.01 16:32

[양승준의 악담(樂談)] ‘문학돌’ BTS라는 신세계

등록 : 2017.10.01 13:41
수정 : 2017.10.01 16:32

아이돌 그룹 방탄소년단이 새 앨범 '러르 유어 셀프 승 허' 수록곡 'DNA'로 한 음악방송에서 1위를 차지한 뒤 트로피를 들고 즐거워하고 있다. 빅히트엔터테인먼트 제공

‘어찌어찌 걸어 바다에 왔네. 이 바다에서 난 해변을 봐. 무수한 모래알과 매섭고 거친 바람 여전히 나는 사막을 봐’.

그룹 방탄소년단의 새 앨범 ‘러브 유어셀프 승(承) 허’의 CD에만 실리고 온라인 음원 사이트엔 공개되지 않은 노래 ‘바다’의 가사다. 그토록 바라던 곳에 다다랐지만, 정작 기다리는 건 새로운 시련이다. 청춘의 혼란일까, 데뷔 5년 차에 한류를 이끄는 아이돌로 우뚝 선 그룹의 불안일까. 팀의 리더인 랩몬스터(김남준ㆍ23)는 무덤덤하게 “내가 닿은 이곳이 진정 바다인가 아니면 푸른 사막인가”라며 툭 랩을 내뱉는다. 믿었던 현실을 의심하는 방식이 문학적이다.

랩몬스터가 이 노랫말을 지었다. 일본 유명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1Q84’를 읽고, ‘희망이 있는 곳에 시련이 있다’는 문장에 감동해 ‘바다’를 만들었다고 한다. 랩몬스터는 “하루키의 팬”이다. 그에게 하루키 얘기를 묻는 건 특별한 선물이다. “저 여기 올라오기 전에도 ‘기사단장 죽이기’ 읽다 왔어요.” 지난 18일 서울 중구의 한 호텔. 랩몬스터는 새 앨범 기자간담회에서 수록곡 가사 관련 하루키 얘기가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표정과 말투엔 설렘과 흥분이 잔뜩 묻어났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서 창작의 영감을 얻고, 조지 오웰의 '1984'를 팬들에게 추천한다. 아이돌 그룹 방탄소년단의 멤버 랩몬스터는 문학으로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독특한 아이돌이다. 최지이 인턴기자

작가 얘기를 묻는 데 이렇게 끓는 물처럼 활기 넘치는 아이돌이라니. 이렇다 보니 랩몬스터는 연애 보다 독서 근황에 관심이 쏠린다. 새 앨범을 내고 한창 정신 없을 랩몬스터는 최근 체코 작가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었다. 최근 한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선 “조지 오웰의 ‘1984’를 오랜만에 다시 읽으니 감회가 새로웠다”며 “요즘 많은 분이 다시 읽어도 좋을 것 같다”며 책 추천까지 했다.

아이돌 인터뷰에서 독서와 정치 얘기는 금기다. 여느 아이돌에 ‘요즘 무슨 책 읽었느냐?’는 질문을 했다면? 현장은 장례식장처럼 분위기가 축 가라 앉고, 기자는 ‘꼰대’ 취급을 당했을 것이다. 소속사에 ‘인터뷰 블랙리스트’가 있다면 1순위로 이름이 오를 것이다, 아마도 명백히.

공공연한 침묵을 깨고 랩몬스터는 문학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그는 올초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방탄소년단 계정에 자신의 방을 찍은 사진을 올렸는데, 정작 화제가 된 건 그의 책상에 놓인 책이었다. 미국 작가 토니 포터가 쓴 ‘맨박스’였다. 여성에 대한 사회적 폭력의 가해자가 왜 평범한 남성들인지를 꼬집는 책이었다.

방탄소년단의 '문학봇'.

랩몬스터는 고전을 창작의 밑거름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독일의 문호 헤르만 헤세(1877~1962)의 소설 ‘데미안’을 모티프로 앨범 ‘윙스’를 기획한 일이 대표적이다. 자극적인 이미지로 주로 소비되는 아이돌과 뿌리 깊은 고전의 만남. 휘발하기 쉬운 시각에 의존하는 이미지는 오래된 이야기를 만나 존재의 기반을 굳건히 다진다.

인기를 얻은 배경이 다른 아이돌과 다르다 보니, 소비되는 방식도 독특하다. 인터넷엔 ‘BTS 문학봇(BTS__letters)’이 등장했다. 방탄소년단 팬들이 작가 김연수의 산문집 ‘우리가 보낸 순간’의 문구 등을 올리며 문학적인 글을 공유하는 공간이다. 아이돌 팬덤의 현상으로 ‘문학봇’이 등장하기는 이례적이다. 문학이 팬들의 연결 고리가 된다는 점도 특이하다.

이 때문에 방탄소년단은 부모나 교사 등 기성세대에 더 크게 각인된다. 도서관과 담을 쌓은 우리 아이 혹은 제자들에게 ‘데미안’ 같은 고전 문학을 접하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줘 ‘기특한 아이돌’로 불린다. 실제로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방탄소년단이 고맙다’는 학부모나 문학 담당 교사의 글이 종종 올라온다. 아이돌 음악 사각지대를 자처했던 이들은 그렇게 방탄소년단에 관심을 두게 돼 소극적 ‘아미’(방탄소년단 팬클럽 이름)가 된다.

그룹 방탄소년단이 최근 미국 빌보드의 앨범 주요 차트인 '빌보드 200'에 7위로 입성했다. 한국 가수 최초다. 빌보드 홈페이지 캡처

방탄소년단은 ‘문학돌’이란 성을 쌓아 세력을 넓힌다. ‘칼군무’와 조각 같은 외모의 미소년 집단이란 K팝 아이돌의 흔해 빠진 스토리엔 새 ‘살’이 붙었다. 자연스럽게 환호의 기반은 넓어졌다. 지난 26일(현지시간) 빌보드에 따르면 방탄소년단은 새 앨범으로 빌보드 주요 앨범 차트인 ‘빌보드 200’에서 한국 가수 최초로 톱10(7위)에 진입하는 기록을 세웠다. 신곡 ‘DNA’는 싱글 차트인 ‘핫100’에 76위를 차지했다. 한국어로 된 노래로는 싸이의 ‘강남스타일’(2012)에 이어 역대 두 번째 기록이었다. 방탄소년단이 문학으로 K팝에 새 옷을 입혀 팝의 본고장인 미국에서까지 저변을 넓힌 비결 중 하나다.

방탄소년단 소속사인 빅히트엔터테인먼트는 SMㆍYGㆍJYP 엔터테인먼트 등 대형 기획사와 달리 미국 법인이 없다. 당연히 미국 진출을 전략적으로 추진하지도 못했다. 방탄소년단의 음악을 ‘직접’ 수입해 즐긴 이들은 미국 음악팬이었다.

빌보드는 방탄소년단이 미국에서 주목 받게 된 이유로 ‘분명한 메시지’를 꼽았다. 많은 아이돌이 군무를 바탕으로 한 천편일률적인 전자 댄스 음악을 내놔 해외에서 힘을 잃어가고 있다. 서사 없이 군무와 강력한 비트에만 집착해 한류의 물결에서 멀어진 아이돌 기획사들이 고민해야 할 지점이 아닐까.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한국일보 페이스북

한국일보 트위터

한국일보닷컴 전체기사 RSS

RSS

한국일보닷컴 모바일 앱 다운받기

앱스토어구글스토어

한국일보닷컴 서비스 전체보기

Go

뉴스 NOW

이전

  • 종합
  • 정치
  • 사회
  • 경제
  • 국제
  • 문화
  • 연예
  • 라이프
  • 스포츠

다음

공사 재개 측 과학적 접근이 20ㆍ30대 사로잡았다
여론조사와 달랐던 신고리 공론조사, 차이는 ‘정보’
잘못 없지만 벌은 받아라? 외교부 ‘이상한 징계’ 논란
대한민국 형사들의 큰형님 33년 경력 김선희 형사과장의 ‘나의 아버지’
자사고, 일반고 전환하면 최대 6억원 지원 받는다
닛산차 ‘무자격자 품질검사’ 스캔들 일파만파
[세계의 분쟁지역] “리비아 난민 수용소에 감금된 우리를 집에 보내 주세요”

오늘의 사진

많이 본 뉴스

  • 1
  • 2
인터랙티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