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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9.11 진상조사', 유가족이 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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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9.11 진상조사', 유가족이 해냈다

입력
2014.09.04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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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운영委, 미국민 여론 움직여 발생 14개월 만에 조사위 출범

라이스 보좌관 테러 정보 묵살 등 당시 안일 대응 만천하에 드러나

알카에다 지도자 자와히리. 알카에다는 오사마 빈 라덴이 창설한 테러 단체로, 9·11테러 등 각종 공격을 자행해왔다. 연합뉴스
알카에다 지도자 자와히리. 알카에다는 오사마 빈 라덴이 창설한 테러 단체로, 9·11테러 등 각종 공격을 자행해왔다. 연합뉴스

미국 9ㆍ11 사건은 테러라는 점에서 세월호 참사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하지만 사건이 안겨준 충격과 사태를 미리 예방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국가안보적 관점에서 보면 9ㆍ11은 미국 본토가 공격받은 최초의 사건이라는 점에서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중앙정보국(CIA) 등 정보기관의 안일한 대응과 그 허점을 노린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으로 무고한 시민 3,000여명이 희생됐다. 한국의 세월호 사건 역시 당국이 화물 과적을 제대로 감시하고 운항을 성실히 통제했더라면, 사고 앞에서 체계적인 구조 역량을 발휘했더라면 막을 수 있는 재앙이었다는 점에서 성격이 같다.

그러나 무엇보다 9ㆍ11 테러를 세월호 참사와 비교해 보게 만드는 것은 이 같은 테러가 어떻게 일어났는지 만천하에 드러난 것이 사법기관의 통상적인 수사를 통해서가 아니라는 점이다. 세월호 유가족이 특별법을 통해 낱낱이 진상을 규명해주도록 요구하는 것과 비슷한 상황은 10여년 전 미국에도 있었다.

9ㆍ11 테러 이전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의 심상치 않은 동향에 대한 정보를 당시 콘돌리사 라이스 백악관 안보보좌관은 묵살했다. 사고 직후 워싱턴으로 돌아와야 할 조지 W 부시 대통령 전용기는 플로리다에서 워싱턴을 향하다 갑자기 기수를 돌려 전시 미군 지휘소인 네브래스카 지하벙커로 날아갔다. 이런 진실은 누구의 노력으로 어떤 과정을 통해 밝혀진 걸까.

미국이 소수 테러리스트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일련의 과정이 속속들이 세상에 알려진 건 사실상 9ㆍ11 진상조사위원회 덕분이었다.

그러나 테러 발생 직후만해도 이 위원회가 생길 가능성은 희박했다. 9ㆍ11 이후 5개월간 미국 의회는 진상 규명을 위한 청문회는커녕 그 어떤 조사위원회도 구성하지 않았다. 진상조사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오히려 철저하게 무시됐다. 미 연방수사국(FBI) 내부의 자체 조사마저 은폐될 정도였다.

부시 대통령이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 마당에 진상조사위원회를 가동하는 것은 전쟁 중 내분을 야기할 가능성이 있어 부적절하다는 게 여당인 공화당의 주장이었다. 뉴욕타임스는 공화당의 이런 행태를 두고 당시 “백악관은 테러를 막지 못한 정부의 실수를 진상 조사할 의지가 전혀 없다”고 비판할 정도였다.

이런 정부ㆍ여당의 반대를 이겨 내고 정식 명칭이 ‘미국 테러 공격에 대한 국가위원회’인 조사위가 출범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9ㆍ11 희생자 유가족의 노력 덕분이었다. 특히 12명의 유가족으로 구성된 ‘9ㆍ11 독립위원회를 위한 가족운영위원회’가 미국민의 여론을 움직이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이 유가족들은 당초 ‘정치적이며 과격하고 국가안보를 저해하는 집단’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9ㆍ11 테러 이전 부시 대통령의 열렬한 지지자였다가 남편을 잃은 뒤 유가족 대표를 맡은 크리스틴 브릿와이저가 자신들을 비난하는 사람에게 보낸 다음 편지가 공개되면서 여론이 반전됐다.

“우리 활동이 대부분 시민들처럼 투표소에서 시작하고 끝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정치인들이 독립적 위원회를 설립해서 테러 공격을 조사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우리는 공개적으로 이렇게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9ㆍ11 테러로 남편을 잃은 우리들은 아이들을 지켜야만 합니다. 만약 당신도 자식이 있다면 부모로서 아이들에게 안전한 환경을 만들어 줄 의무와 책임이 있다는 걸 알겠지요. 너무 지치고 겁도 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왜냐고요? 우리는 왜 우리 아이들의 아버지가 죽었는지 아이들에게 말해줘야 하고, 그들이 더 안전한 미국에서 살 수 있도록 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죠.”

여론이 들끓자 부시 대통령은 이 전대미문의 테러가 발생한지 14개월 뒤인 2002년 11월27일 ‘위원장은 내가 지명한다’는 조건을 달고 마지 못해 조사위 설립에 동의했다.

● 성역 없이 전방위로 진상 조사

범국가적, 초당적으로 출범한 이 위원회는 공화당과 민주당이 추천한 10명 위원으로 꾸려졌고, 직원 80명이 별도로 고용돼 실제 조사를 담당했다. 기밀정보 사용 허가를 받은 직원들은 각 분야 최고의 전문가로 구성됐다. 정보기관 부국장, 주 법무장관, 하버드대 역사학과 교수, 국가간 자금 이동관련 전문가와 연방 검사 등이 포진했다.

최초 300만달러(30억원), 두 차례 증액을 거쳐 총 1,500만달러(150억원) 예산 지원을 받은 이 위원회는 조사 기간 중 10개국에서 1,200명이 넘는 사람을 만났다. 국가안보 문서 등 관련 자료 250만 페이지를 검토했고, 2003년 3월부터 2004년 6월까지 총 12차례(19일)의 청문회를 열었다.

청문회의 첫 증인은 생존자와 피해자 가족이었다. 그들은 9ㆍ11 사태 이후 변해버린 삶을 이야기했다. 이후 부시 대통령, 딕 체니 부통령, 콜린 파월 국무장관 등 고위 공무원이 줄줄이 증언석에 앉았다. 부시 대통령 등 일부 인사의 증언은 비공개로 처리됐지만 공식 사이트(www.9-11commission.gov)에는 청문회 속기록과 녹취 파일, 보고서 등이 낱낱이 게재됐다.

조사 결과는 1년 8개월 뒤인 2004년 7월 최종보고서 형태로 공개됐다. 9ㆍ11 테러 원인으로 위원회가 내린 최종 결론은 ‘상상력의 실패’였다. 테러 공격 위험이 높아지는데 미국 정부가 더 큰 공격이 있을 가능성을 예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또 제2의 9ㆍ11 테러를 막기 위해 해야 할 41가지를 권고했다. ▦경찰, 소방관 등 초동대응 요원이 사용하는 비상 무선주파수 확보 ▦테러 취약 도시ㆍ분야 예산 편성 ▦국가테러방지센터 신설 ▦FBI의 국가안보 인력 증강 등이다. 2011년에는 이 권고 사항이 얼마나 잘 이행되는지를 평가한 ‘10년 보고서’도 나왔다.

위원회가 부시, 클린턴 등 전현직 대통령을 조사하고 정보기관에서 기밀 자료를 넘겨 받을 수 있었던 건 그만큼 권한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전면적 수사권은 배제됐지만 필요한 사람을 불러낼 수 있는 소환권이 주어졌다. 조사 과정에서 소환권은 세 차례 행사됐다. 연방항공청과 국방부, 뉴욕시가 각각 자신들에게 불리한 증언과 자료 제출에 미온적 반응을 보였을 때였다.

실제로 연방항공청은 테러 당시 상황이 담긴 녹음테이프와 일지 등을 일부만 제출했다가 이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자 관련자 소환과 자료 압수조치를 당했다. 이처럼 정부 기관들이 위원회에 비협조적이라는 사실이 알려진 뒤 여론의 역풍을 의식한 백악관은 미국 역사상 한번도 공개한 적이 없던 ‘대통령 일일보고’(PDB)까지 위원회에 제출해야 했다. 소환권이 위원회의 목적 달성에 상당히 기여한 것이다.

● 유가족 집단행동으로 조사에 힘 보태

유가족들은 위원회가 제 기능을 발휘하는데도 힘을 기울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라이스 국가안보보좌관이 청문회 출석에는 동의하면서도 증언에 따른 법률적 책임을 면하기 위해 선서 없는 증언을 고집했을 때였다. 유가족들은 저항의 의미로 일제히 청문회장에서 퇴장해버렸다. 여론이 나빠지자 라이스 보좌관은 증언 전에 선서를 할 수밖에 없었다.

유가족의 압력으로 증언석에 반강제로 나간 라이스 보좌관은 2001년 8월6일자 PDB 제목이 ‘오사마 빈 라덴 미국 본토 공격 결정’이라고 된 것과 관련한 질문에 ‘역사적’인 내용이었을 뿐 새로운 게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백악관이 기밀해제해 공개한 실제 문서에 ▦알 카에다의 항공기 납치 가능성 ▦미국내 조직원 모집 ▦조직 구성원 움직임 등의 자료까지 포함됐던 게 알려지면서 거센 비판을 받았다. 유가족들은 언론과 정부가 제대로 공개하지 않은 문서들을 자신들의 웹사이트에 올려 조사 과정에서 투명성이 보장될 수 있도록 노력하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위원회는 자칫 묻힐 뻔 했던 다수의 진실들을 밝혀 낼 수 있었다. ▦대통령 전용기에 대한 위협이 없었는데도 테러 발생 직후 부시 대통령을 지하벙커로 대피시키기 위해 전용기가 네브래스카로 진로를 바꾼 사실 ▦테러범에 납치된 여객기가 워싱턴 국방부 건물을 공격했을 때 인근 기지에 이를 저지할 전투기가 배치돼 있었지만 50분이나 늦게 출동한 사실 ▦미군에 경계강화 지시를 내린 사람이 부시 대통령이 아니라 리처드 마이어스 합참의장 대행이었다는 점 등이 드러났다.

리처드 클라크 백악관 테러담당 보좌관이 9ㆍ11 테러를 막지 못한 데 대해 유가족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구한 곳도 위원회가 마련한 청문회장이었다. 클라크 보좌관은 “부시 대통령이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 제거를 1순위에 두어 (사전에 첩보가 입수됐어도)미국에 대한 테러 가능성을 긴급한 안건으로 취급하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 늦게 시작해 빨리 끝나 한계 적잖아

하지만 이런 성과에도 불구하고 유가족들은 ‘위원회가 내놓은 최종 보고서는 부실투성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9ㆍ11 테러의 원인과 의문점들이 청문회 과정에서 언급됐고 진실 규명을 위한 결정적 증거들이 제시됐는데도 위원회가 이를 최종보고서에 포함시키지 않았다는 이유다.

실제로 최종보고서는 미국이 9ㆍ11 테러 이전에 받았던 경고와 관련한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 ‘알 카에다 공격이 임박한 위협’이라는 문구가 들어가기는 했지만, CIA 당국자가 청문회에서 라이스 보좌관에게 구체적 위협에 대해서 경고했다고 진술한 내용은 포함하지 않았다.

유가족들은 자신들의 주장 대로 최종보고서가 작성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를 정치적 독립성 상실에서 찾고 있다. 부시 대통령은 처음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을 위원장으로 지명했으나 언론들의 비판을 받고 그가 낙마하자, 자신의 오랜 친구인 토마스 킨 전 뉴저지 주지사를 선택했다. 공화당과 민주당이 각각 5명씩 지명한 위원들도 독립적이지 못한 처신을 보였다. 공화당이 추천한 필립 제리코 사무총장은 백악관 정치고문인 칼 로브와 네 차례나 사적으로 만난 사실이 뒤에 드러났다. 그가 백악관 내부 사람과 수 차례 전화 통화한 것도 확인됐다.

진상조사위원회가 뒤늦게 만들어지고 서둘러 활동을 마무리한 것도 완벽한 진실 규명에 실패한 요소로 꼽힌다. 토마스 킨 위원장은 ‘9ㆍ11 위원회 내부 이야기’라는 저서에서 ▦사태 발생 14개월만에 발족되는 바람에 중요한 증거가 사라지고 핵심 증언자의 기억이 희미해진 점 ▦조사할 내용에 비해 조사 기간이 짧았다는 점 ▦초기 300만달러라는 부족한 예산 등으로 위원회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털어놨다.

위원회가 관련 기관이나 책임자 문책이 배제된 보고서를 내놓으면서 선서도 하지 않고 증언대에 선 부시 대통령과 체니 부통령의 증언을 비공개로 부친 것도 한계로 지적된다. 진실 규명을 명분으로 미국 교도소에 수감된 9ㆍ11 테러 혐의자들에게 가혹한 심문기술을 사용한 점도 위원회 활동의 정당성을 떨어뜨린 오점으로 거론된다.

워싱턴=조철환특파원 chc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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