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수대교~강변북로 잇는 도로 2005년 개통되며 도보 길 없어져
무단횡단 등 사고 위험에 노출… 어제 유족 등 참석 20주년 위령제
“안전 때문에 희생된 사람들을 위해 세운 위령비마저 가장 불안전한 곳에 있는 게 현실입니다.”
21일 오전 서울 성수대교 북단 희생자 추모 위령비. 이날은 꼭 20년 전인 1994년 10월 21일 성수대교 붕괴 사고로 어이없는 죽음을 당한 희생자 32명의 위령제가 열리는 날이었다. 사고 20주년을 맞아 고인을 추모하는 엄숙한 자리였지만 유족들은 분통부터 터뜨렸다.
성수대교 붕괴로 남동생을 잃은 김모(53)씨는 “동생의 넋이라도 기리려면 목숨을 걸어야 할 판”이라고 했다. 위령비 위치가 사방이 도로로 에워 싸인 ‘외딴 섬’ 같은 장소이기 때문이다. 현재 도보로 위령비에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없다. 추모객들은 서울시한강사업본부에서 나와 성수대교 북단 강변북로를 따라 3~4분 정도를 위험천만하게 걸어야 위령비 인근에 다다를 수 있다.
‘곡예 보행’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도로 위를 걷다가 왼쪽 편에 위령비 주차장이 보이면 길을 건너야 하는데 횡단보도나 신호등이 전혀 없어 쌩쌩 달리는 차들이 뜸한 틈을 타 쏜살같이 무단횡단을 할 수밖에 없다. 또 그러고 나서도 주차장에서 한 번 더 무단횡단을 해야 위령비가 세워진 곳에 도착할 수 있다. 한 유족은 “위령비 근처 차도에 노란색 과속 방지턱이 있었는데 교통 흐름에 방해가 된다며 몇 해 전 치웠다”고 말했다. 안전 참사의 대명사인 성수대교 사건 위령비가 여전히 안전 사고를 유발할 수 있는 악재를 두루 갖추고 있는 셈이다.
위령비를 도심 속 섬으로 만든 건 관계기관의 안전 불감증에서 비롯됐다. 서울시는 사고 3년 뒤인 1997년 지금 장소에 위령비를 건립하고 주변 조경을 조성했다. 문제는 2005년 불거졌다. 성수대교 북단과 강변북로를 잇는 도로가 개통되면서 위령비로 가는 도보 길이 끊겼지만, 경찰은 해당 차로가 고속화도로라는 점을 이유로 횡단보도 설치 등에 난색을 표했다. 이에 일부에서 위령비를 이전해 달라는 요구도 제기됐으나 유족들의 반대에 부닥쳤고, 서울시가 손을 놓고 있는 사이 10년째 아슬아슬한 무단 횡단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위령비는 가족들이 희생자의 명복을 빌고 참사가 재발되지 않도록 교훈을 주기 위해 만든 것인데 이처럼 접근 자체가 어려운 곳에 있는 것도 문제라는 지적이 나온다. 서울시 관계자는 “강변북로 진ㆍ출입 램프 설치 이후 접근이 어렵다는 민원이 빗발쳤다”며 “위험성이 큰 만큼 횡단보도 등 안전시설 설치를 적극 검토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이날 위령제는 비가 내리는 가운데 희생자 가족과 지인 20여명이 참석해 차분한 분위기 속에 치러졌다. 추모객들은 희생자 32명의 이름이 불려질 때마다 위령비 앞에 나와 묵념과 헌화를 한 뒤 고인의 삶을 추억했다. 당시 무학여고 1년생 동생을 잃은 한 유족은 “사고 당일도 오늘처럼 하염없이 비가 내렸다. 우산을 사러 간 사이 동생이 등굣길에 나서지 않았다면 비극을 피할 수 있었을 텐데…”라며 눈물을 훔쳤다. 사고로 형이 희생된 유가족 대표 김학윤(48)씨는 “정부가 20년 동안 안전을 외쳤건만 언제 어디서 죽을지 모르는 대한민국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는 것 같다”며 “땜질식 처방이 아닌 전반적인 재난 시스템을 제대로 만들어야 더 이상 억울한 죽음이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태무 abcdefg@hk.co.kr 김민정기자 fac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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