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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는다, 고로 존재한다] 옷맵시 좌우하는 신체와의 맞음새

입력
2015.07.09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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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옷태 좀 난다’란 말. 언제 들어도 기분이 좋다. 똑같은 옷을 입어도 누군가는 ‘와! 이 옷은 어디서 샀어?’라는 반응을 얻고 또 누군가는 ‘이런 옷을 어디서 샀어?’란 빈정거림을 듣는다. 한 끗 차이에 울고 웃는다. 사전을 찾아보면 ‘옷을 입은 모양새’란 뜻의 우리말은 옷매, 옷매무새다. 또 옷을 어울리게 잘 입은 차림을 뜻하는 말로 ‘옷맵시’를 쓴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옷테나 옷태라는 단어를 쓴다. 모두 사전에 없다. 옷맵시가 맞다.

옷테나 옷태도 되짚어 보면 말이 통한다. 옷테의 테는 테두리선, 프레임이라는 의미로 썼지 싶다. 옷의 테두리선은 실루엣을 뜻하니 의미가 통한다. 태(態)라는 한자도 마찬가지. 마음 심(心)자에 능력 능(能)자가 결합된 단어다. 말 그대로 마음이 막힘이 없이 수월한 상태, 자신감이다. 맵시란 자신감에서 나온다는 뜻이리라.

사람들은 맵시 나는 옷차림을 위해 각종 패션 사이트를 들러 멋쟁이들의 옷차림을 연구한다. 나 또한 이탈리아의 모델이자 배우인 올리비아 팔레르모의 사이트에 접속, 그녀가 옷을 소화하는 방식을 면밀히 검토한다. 뭘 입어도 옷맵시가 나는 여자. 항상 궁금했다. 옷맵시가 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옷맵시의 구성요소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옷의 모양새를 결정하는 것은 핏(fit), 바로 맞음새다. 이 맞음새는 옷이 3차원인 인체에 얼마나 잘 맞는가를 말해주는 지표다. 의외로 사람들은 맞음새보다 선호 색상, 소재, 스타일을 중심으로 옷을 산다. 사고 싶은 옷을 발견했을 때, 자신의 실제 치수보다 한 치수 큰 옷 앞에선 ‘이번 시즌엔 좀 크게 나왔어요’란 점원의 말에 속고, 한 치수 작은 옷 앞에선 ‘헬스 다녀야지’라며 원대한 꿈에 도전한다.

옷은 안 맞으면 아무리 디자인과 원단, 바느질이 좋아도 소용없다. 재단기술에는 핏(fit)을 평가하는 5가지 기준이 있다. 신체의 중심선과 직물의 올의 방향이 평행을 이루는지, 주름이 생기지 않고 몸에 잘 맞는지, 신체의 자연스러운 선과 옷의 구조적인 선의 배열이 잘 이뤄져 있는지, 옷을 앞과 뒤 옆에서 봤을 때 대칭을 이루는지, 옷의 여유분은 어느 정도인지를 살펴야 한다.

패션의 역사에서 핏이 스타일링의 요소로 등장하게 된 것은 19세기 후반이다. 당시 사람들은 이전 시대 귀족들의 과시적 낭비에 대해 강한 미적 반감을 품었다. 자수를 놓는 데만 6개월이 걸리는 등 옷의 표면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일보다, 디자인의 정확성과 기능의 효율성을 강조하는 제작 철학을 받아들이며 이전시대와 결별했다. 특히 20세기 들어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생태미학의 길이 열리면서 큰 것에서 작은 것으로, 맞음새, 신뢰성, 기능성, 새로움의 가치를 배우는 쪽으로 변화해갔다. 옷은 정신의 견고한 외피여야 한다는 생각이 곳곳에 퍼졌다. 옷 자체의 구조성에 눈을 돌린다.

핏이란 그저 옷의 맞음새를 표현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기업이나 정치조직 등 조직의 각 부문별 의사소통이 원활하고 응집력이 좋고 상호간 자원배분이 잘 될 때, 조직간 적합도(fit)가 높다고 표현한다. 한 국가의 사람과 사람 사이, 꿈을 두고 경쟁하는 이들을 위한 무대를 만드는 원칙에도 이 핏의 원리가 적용되지 않을까? 우리사회는 너무 몸에 밀착된 옷을 입고 있다. 여유분이 없다. 여유란 다른 것이 아니다. 사회적 약자를 포용하고 그들의 생각을 다시 경쟁의 장에 끌어들일 수 있는 여백을 말한다. 혁신적 생각을 갖고 도전한 이들에게, 재도전의 기회를 주지 않는 사회는 건강하지 않다.

경쟁과 공존을 한 자리에 배치하는 디자인의 원리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이 여백이다. 너무 많이 주면 느슨해 보이고, 너무 적게 주면 찢어진다. 옷의 아름다움을 결정하는 것이 구조의 대칭성에 있듯, 사회의 장 속에서 함께 경쟁하는 이들의 출발선과 과정, 그것을 나누는 결과물의 무늬가 대칭성을 띠고 있는지 다시 물어야 한다. 신체의 자연스러운 성장과 사회의 성장구조, 그 선은 동일하게 흘러가야 한다. 그래야 핏이 살아있는 규칙과 정신의 옷을 입은 사회가 된다. 그런 사회라야 사람들이 세상을 향해, 핏대 올리는 일이 줄지 않을까?

김홍기ㆍ패션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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