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 청년리포트] (2) 취업-한국편
26살 남자의 정의(定義) ‘대기업과 중소기업 아니면 취준생’
“처음 학부 졸업할 땐 삼성이란 타이틀을 달면 부모님께 자랑스러운 아들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있는 지금은 아버지께 ‘저는 삼성 말고 연봉 얼마 주는 무슨 회사에서 일하고 싶은데, 삼성은 아니지만 재미있게 일할 수 있을 것 같아요’라고 말하고 싶어요. 하지만 현실적으론 힘든 얘기죠. 결국 어쩔 수 없이 번듯한 대기업에 취직해서 친구분들께 자랑하시라는 말씀 밖에 드릴 수가 없어요. 누가 만든 사회인지 알 순 없지만, 이게 한국의 현실인 것 같아요.”
서울의 유명 사립대 대학원에 재학 중인 강병우(27)씨는 “한국에서 26살 남자를 두 부류로 나누면 걔는 대기업, 쟤는 중소기업이다”라며 “취업을 앞둔 사람들이라면 ‘누구 아들은 어디 대기업 갔다더라’는 부모님의 우회적인 채근을 안 들어본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강씨는 2013년에 지방 국립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했다. 당시엔 일단 취업을 하고 보자는 생각이었다. 전공을 살리기 보단 건축, 정유, 화학, 제약 등 20개 가까운 회사에 원서를 냈다. 합격한 회사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취업을 포기하고 대학원 진학을 선택했다. “면접 때 ‘잘 할 수 있겠냐’는 질문에 자신 있게 답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대학원에서 전공에 대해 더 깊게 공부하면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은 뭔지, 어떤 일을 잘할 수 있는지 구체화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석사 졸업을 반년 앞둔 지금, 그의 목표는 바뀌었다. 표면적으로 대기업이란 사실엔 변함이 없지만 맹목적으로 ‘삼성’만을 보고 달려갔던 2년 전과는 다르다. 강씨는 “학부 졸업 때 목표였던 삼성 취업은 내가 원했던 목표가 아니라 사회가, 부모가, 친구가 세운 목표였다”며 “이제는 내가 회사에 가서 어떤 일을 하면 재미있겠다는 구체적 목표를 세울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석사 학위를 땄다고 회사를 골라갈 만큼 한국 취업시장이 녹록하진 않지만, 뚜렷한 목표가 생긴 덕에 그는 단단해졌다. “취업 시장에서 학사나 석사나 큰 차이는 없기에 불안함은 여전하다”면서도 “이젠 남들의 기준이 아닌 나 스스로의 목표가 생겼기 때문에, 실패가 두렵지만 그걸 극복할 수 있는 힘을 기르려고 노력 중”이라고 말했다.
연구실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 강씨는 하루 10시간 이상씩 연구실에 파묻혀 지낸다. 취업한 친구들과 통화할 때면 누가 더 오래 회사에, 연구실에 있었는지 경쟁하듯 서로의 힘든 삶을 토로한다. 이런 삶 속에서 희망을, 행복을 얘기할 수 있을까? 강씨는 “일과 돈에서 행복을 찾자면 100점 만점에 49점 밖에 못 준다”며 “오늘보다 내일 더 적게 일하면서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것 같진 않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댔다. 하지만 그렇다고 희망을 놓진 않았다.
“저는 도피성 어학연수도 가보고, 도피성 창업도 해봤고, 졸업 유예도 했었고, 막상 대학원 진학도 도피성이 짙죠. 하지만 결국 도망갈 데는 없어요. ‘탈조선’은 답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이런 얘기하면 누군가는 제게 ‘좋은 숟가락 타고났다’고 할 수도 있지만, 절대 아니에요. 제가 깨달은 행복하게 사는 방법은 두 가집니다. 남과 비교하기 시작하면 그 순간 지옥이라는 것, 그리고 일을 피할 수 없다면 즐겨야 한다는 거죠. 일에서 어떻게 재미를 찾냐구요? 그래서 끊임없이 삶의 목표를 되뇌며 살고 있습니다.”
“운동은 100등 해도 막막, 공부는 1만등 해도 활짝”
서울 사당동에 살고 있는 황재용(27)씨는 강병우씨와 동갑내기지만, 현재 상황은 많이 달랐다. 황씨는 최종학력 고졸에 “알바로 담뱃값 정도 버는”실질적 백수다. 하지만 그도 한때는 대학 시절 학생운동에도 참여했던 열혈 사회학도였다.
강원 정선군 사북읍이 고향인 황씨는 중학교 2학년 때 검정고시를 결심했다. 슈퍼마켓과 문방구 자리엔 전당포가 들어섰고, 동네 골목은 모텔촌으로 바뀌었다. 이쯤 되면 사람 살 곳이 못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2000년 문을 연 강원랜드 카지노가 몰고 온 변화였다.
뜻밖에 아버지는 쉽게 설득할 수 있었다. 마라톤 선수 출신인 황씨 아버지는 ‘운동선수는 전국에서 100등 해도 살길이 막막하지만, 공부는 1만등 안에만 들어도 미래가 보장되는 것 아니냐’는 말을 입에 달고 사셨다. 공부하겠다니 말리진 않으셨다.
그렇게 서울에 온 게 2004년. 고향에서 신문 배달하며 모은 돈도 바닥나고, 집안 형편 때문에 부모님의 지원도 이따금씩 끊기다 보니, 17살 어린 나이엔 감내하기 버거운 생활고가 닥쳐왔다. 폐기 직전의 편의점 삼각김밥 2개와 컵라면으로 하루를 때웠고, 고시원 총무가 방문을 두드릴 땐 쥐 죽은 듯 숨죽이기도 했다. 황씨는 “당시 극심한 무력감을 느꼈다”고 했다.
곡절 끝에 수도권 4년제 대학교 사회학과에 합격했다. 하지만 무력감의 트라우마는 대학교 4학년 때 다시 찾아왔다. 군 제대 후 집안 문제와 등록금 문제 등에 겹겹이 압박을 느낀 황씨는 “어느 날 그냥 모든 걸 놓아버리는 수 밖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고 회상했다.
그 결과는 제적이었다. 황씨는 자신의 ‘유리멘탈’ 때문이었음을 시인하면서도, “내가 ‘금수저’였다면, 돈의 문제가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격려를 받으며 실패를 딛고 일어설 수 있는 삶의 태도를 배웠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은 든다”고 말했다.
황씨도 ‘노답’인 ‘헬조선’에서 행복을 찾는 방법에 있어선 강병우씨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 “알랭 드 보통의 TED 강연을 인상 깊게 봤는데, ‘실패도 두렵지만 가장 나쁜 건 끝에 가서 원하지 않는 결과를 얻었을 때’라며 ‘각자 스스로 진정 원하는 게 뭔지 깊게 생각해보고 그 성공을 좇는 게 좋다’는 내용이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이어 “나만의 가치관을 세우고 나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면 행복은 따라오지 않겠냐”며 “의욕을 가질 수 있는 일들을 찾아 새해엔 새로운 삶에 도전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김경준기자 ultrakj75@hankookilbo.com
사진 김주영기자 will@hankookilbo.com
※이 기사는 한국일보 특별기획 ‘한중일 청년 리포트’의 일부입니다. ▦취업&창업 ▦주거 ▦결혼 ▦관계 등 총 네 가지 주제에 따라 각각 한국, 중국, 일본 청년들의 사례를 다루어 총 12편의 기사가 연재됩니다. 한국일보닷컴에서 전체 기사를 디지털 인터랙티브 형식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바로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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