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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폭력의 공범

입력
2017.09.10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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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은 전교생이 서른일곱 명인 분교에서 초등학생 시절을 보냈다. 아들이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 우리 가족은 다소 낭만적 꿈을 가지고 시골로 이사했다. 귀농을 결심할 때는 아들에게도 질 높은 삶을 제공할 수 있으리라 상상했다.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뛰놀며, 학교 친구들을 경쟁상대로만 보게 되는 도시 아이들과 달리, 몸으로 부딪히는 우정을 경험할 것이라 기대했다. 상상과 기대는 쉽게 무너졌다.

아들은 공부에 대한 부담이 거의 없는 학교생활을 했다. 같은 학년의 학생 수가 다섯 명이었으므로, 아무리 공부를 못해도 5등 안에는 들었다. 학생 수가 적어서 두 학년이 같은 교실에서 공부했으니, 수업의 질이 좋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1,2 학년까지 큰 문제는 없었다.

3학년이 되어 4학년 형들과 함께 수업을 받게 되었다. 그 무렵부터 아들은 아침마다 학교에 가기 싫다고 짜증을 냈고, 어느 날부터인가는 배가 아프다거나, 머리가 아프다고 울었다. 나는 학교 가기 싫어서 꾀병을 부리나 싶어 살살 달래서 학교에 보내곤 했다. 거의 한 학기 동안 그런 일이 지속되었다. 어느 날, 읍내에 나갔다가 차를 몰고 돌아오는 길에 도로를 걸어가고 있는 아들 친구를 만났다. 걸어가기에는 집이 꽤 멀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차에 태웠다. 그런데 운전석 옆 조수석에 앉아있던 그 애가 뜻밖의 말을 했다.

“4학년 형들이 우리를 만날 때려요. 배를 주먹으로 막 때리고 발로 차고, 원산폭격 시키고, 게임기랑 돈도 갖고 오라고 했어요.”

기억을 더듬어 보니, 아들도 형들이 괴롭혀서 학교에 가기 싫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들었다. 형들이 심부름을 시키거나 하기 싫은 축구를 하라고 강요해서 짜증이 나는가 보다, 라고 짐작했다. 그래서 형들과 사이 좋게 지내야 한다고 타이르곤 했다. 아들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아들 말을 흘려 들은 나를 얼마나 자책했는지 모른다.

폭력과 협박의 주범으로 지목된 4학년 아이는 조부모와 함께 살고 있었다. 부모가 갈라서는 바람에 서울에서 돌봐줄 사람이 없어 어린 여동생과 함께 시골로 보내졌다.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시골에는 그런 식으로 졸지에 손자손녀를 돌보는 처지가 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종종 있다. 할머니는 좋은 분이었으나, 할아버지는 종종 그 애를 심하게 체벌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문제의 그 아이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은 친할아버지뿐만은 아니었다. 분교로 발령이 나는 교사들 가운데는 본교에서 문제를 일으켜 오지의 분교로 보내지는 사람들이 가끔 있었다. 그 때 아들의 담임이 그런 사람이었다. 특히 그 애는 담임에게 따귀를 맞고, 발로 차이기도 했다고 아들에게 들었다. 언젠가 내가 할머니에게 슬쩍 귀띔해주었지만, 우리 애가 워낙 말을 안 들으니 어쩔 수 없다는 반응이 돌아왔다.

아들 친구에게 그 애의 폭력과 폭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뒤, 나는 그 애를 따로 불러냈다. 그리고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말라고 나무랐다. 내 아들과 친구들을 때리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했다. 분노에 차서 그런 말들을 내뱉는 동안, 그 애는 불안한 듯 내 눈치를 살피면서도 세상과 완전히 분리된 듯 무감각하고 불투명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이후로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나는 담임교사나 그 애 할아버지를 찾아가 어린 아이를 각목으로 때리거나 발로 차면 안 된다는 말을 하지 못했으니까. 그러면 아직 혼자 설 수 없는 정신과 몸이 돌이킬 수 없게 망가질 수 있다는 말도 하지 못했으니까. 나는 비겁하고 냉담했다. 막연히 무엇인가가 두렵기도 했다. 그것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약자에게 휘둘러지는 폭력의 공범이 되는 일보다 더 두려웠던 그것은.

부희령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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