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황영식
주필

등록 : 2015.06.25 18:01
수정 : 2015.06.26 08:24

[황영식의 세상만사] 거부권 손익계산서

등록 : 2015.06.25 18:01
수정 : 2015.06.26 08:24

승부사 기질로 존재감 부각에 성공

협량과 불통의 이미지도 따라 커져

본질적 정치체질 문제는 되레 희석

텅빈 본회의장

25일 오후 예정된 국회 본회의가 박근혜 대통령의 국회법 개정안 거부권 행사로 파행을 겪으면서 열리지 못하고 있다. 연합뉴스

박근혜 대통령이 끝내 거부권을 행사함으로써 국회법 개정안은 사실상 죽음을 맞았다. 유일한 대항 절차인 국회의 재의결은 이미 불가능하다.

새누리당 지도부는 즉각 “대통령의 뜻을 존중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런 사태를 피하려고 애썼던 정의화 국회의장의 언짢은 마음과 야당의 반발을 고려하더라도 ‘재적의원 과반수 출석과 출석의원 3분의 2이상의 찬성’이란 요건은 충족 불능이다.

이로써 국회법 개정안을 막겠다는 박 대통령의 당면 목표는 달성됐다. ‘타고난 승부사’ 기질을 발휘했다는 점에서 임기 반환점이 가까울수록 절실한 존재감 부각에도 긍정적이다. 아울러 ‘원칙의 박근혜’‘일관성의 박근혜’ 이미지를 강화하는 데도 성공했다. 박 대통령은 5월29일 새벽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국회법 개정안에 대해 6월1일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정부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공언한 바 있다. 중대한 사정변화가 없는 한 뒤집을 수 없는 자세였고, 결국 24일 만에 이를 관철했다. 또한 유승민 원내대표를 비롯한 여당 내 비박(非朴)계의 세 확산 움직임에 쐐기를 박고 당ㆍ청 관계의 주도권을 확보, 적어도 여권 내에서는 권력누수(레임덕) 지연에 성공했다.

여기까지가 전부다. 거부권 행사라는 커다란 칼을 휘둘러 얻은 것 치고는 그리 짭짤한 수익이 아니다. 치러야 할 비용을 감안하면 더욱 보잘것없다. 우선 존재감과 원칙론자로서의 이미지 부각에는 불통(不通)과 협량(狹量ㆍ속좁음)의 이미지 강화가 따른다. 정치지도자에게 요구되는 원칙과 결단, 강고한 의지는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대화와 타협을 통한 이해 조정’이라는 정치의 본령에 기초할 때만 의미를 갖는다. 더욱이 유 원내대표를 직접 비난하고, 유권자 심판까지 호소한 것은 지나쳤다. 두 사람의 정치적 인연에 비추어 박 대통령의 개인적 배신감이 어느 누구보다 클 수 있다고 이해해도 그렇다. 두고두고 저잣거리의 화제가 될 것이다.

국회와의 전면전, 특히 여당 내 비박계와 야당과의 전면적 대결을 선언함으로써 박 대통령이 잃은 것은 의외로 많다. 말이 국무회의 발언이지, 실제로는 대국민 담화였다. 내용도 길었고, 표정과 어투도 단호했다. 주권자인 국민의 심부름꾼인 의원들이 선거에서의 약속과 달리 제 잇속 챙기기에만 바쁜 현실을 널리 알려 국민 지지를 확보하고, 이를 바탕으로 국회와의 싸움을 완전한 승리로 이끌 심산일 게다. 국민 다수가 ‘정치 혐오’에 빠져 있고, 국회의원을 ‘도둑님’쯤으로 여기는 세태를 고려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동안 여러 차례 행해진 여론조사에서 거부권 행사에 반대하는 응답자는 불어났다. 특히 ‘정의화 중재안’에 여야가 합의한 이후 그랬다.

박 대통령은 “정치가 국민을 위해 존재하고 국민을 위한 일에 앞장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민생현안은 뒷전이고 당리당략에만 집착하는 듯한 정치권을 질타하기 위한 말이다. 그러나 모처럼 잠잠해진 정국에 거부권 행사라는 ‘핵 폭탄’을 투하해 대소동을 부른 대통령의 정치행위는 어떻게 봐야 하는가. 당장 야당은 재의결 일정에 앞서 모든 의사일정을 거부하기로 했다. 야당의 ‘대정부 투쟁’은 현재의 당내 분란을 수습할 절호의 탈출구이기도 해서 좀처럼 수그러들 기미가 아니다.

국민은 대치 정국의 장기화할수록 원인과 경과를 따지기보다 그때그때의 대결 상황에 눈길을 빼앗긴다. 아무런 관련이 없는 국회법 개정안을 공무원연금 개혁과 연계해 끼워 넣은 데다 헌법이 보장한 정부의 행정입법권이나 사법부의 명령ㆍ규칙 심사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는 등의 본질적 쟁점은 점점 더 흐릿해진다.

거부권 행사 관측이 무성한 가운데 극적으로 개정안 수용을 선언하면서 야당의 정치행태나 개정안의 본질적 문제점을 지적했다면 능히 피할 수 있었던 손실이다. 대통령의 손실이기에 앞서 국가적 손실이란 점에서 안타깝기 짝이 없는 패착(敗着)이다. 아울러 누구도 대통령을 통 큰 정치로 이끌지 못한 권력주변의 인적 한계를 뇌리에 새긴다.

황영식 논설실장 yshw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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