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기억할 오늘] 페드로 호아킨 차모로 (1.10)

입력
2018.01.10 04:40
30면
0 0
페드로 호아킨 차모로(왼쪽)와 비올레타 차모로. .laprensa.com.ni
페드로 호아킨 차모로(왼쪽)와 비올레타 차모로. .laprensa.com.ni

니카라과의 언론인이자 소모사 집권기 반체제 인사 페드로 호아킨 차모로(Pedro Joaquin Chamorro)가 1978년 1월 10일 암살 당했다. 니카라과의 첫 여성 대통령 비올레타 차모로(Violeta, 1990~96년 재임)의 남편이다.

차모로 가문은 19세기 독립 이후 20세기 초까지 여러 명의 대통령을 배출한 명문가로, 진보 성향 신문 ‘라 프렌자(La Prensa)’를 운영했다. 가톨릭학교 ‘라 살레’에서 수학했고, 마나과중앙대학과 멕시코 국립자치대(UNAM)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52년 부친이 숨진 뒤부터 라 프렌자의 편집인 겸 발행인으로 글을 쓰며 신문사를 운영했다. 비올레타와는 50년 결혼했다.

친미 소모사 가문이 권력을 잡은 건 30년대 말부터였다.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가르시아(Anastasio Somoza Garcia)가 1937~47년 집권했고, 3년을 거른 뒤 50년 재집권해 56년 숨질 때까지 반공독재권력의 기틀을 다졌다. 그의 장남 루이스 소모사 데바일레가 바통을 이었고, 63년 차남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데바일레(Anastacio Somoza Debayle, 1925~1980)가 권좌에 앉아 1979년 산디니스타 혁명으로 쫓겨날 때까지 독재했다. 페드로와 아나스타시오는 ‘라 살레’ 동기동창이었지만, 소모사 3대 독재 정권의 가장 강력한 비판자가 페드로였다.

1954년 대통령 암살 미수사건에 연루돼 2년 형을 선고 받은 것을 시작으로, 그는 생애 대부분을 투옥과 고문, 추방령과 살해 위협 속에 살았다. 74년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의 무장투쟁이 본격화한 뒤부터는 감시와 탄압이 심해졌고, 갖은 검열 속에서도 차모로는 ‘라 프렌자’를 지켰다. 그는 75년 소모사에게 보낸 공개 서한에 “나는 명징한 의식과 평온한 영혼으로 당신의 다음 공격을 기다리고 있다”고 도발하기도 했다. 그는 출근길 승용차에서 괴한이 쏜 산탄총에 희생됐다. 살벌한 시대였지만 수많은 시민들이 그의 장례식에 참석해 운구했고, 마나과를 비롯한 주요 도시 곳곳에서 격렬한 시위가 이어졌다.

라 프렌자를 이어 경영한 비올레타 차모로는 남편 못지않은 담대함으로 남편의 유지를 이었다. 그리고, 84년 출범한 뒤 분열과 부패로 피폐해진 산디니스타 혁명정부에 이어 90년 대선에서 대통령이 됐다.

최윤필 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