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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두테르테의 계산

입력
2016.09.26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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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테르테의 계산

필리핀 마닐라에서 22일 '두테르테 대통령'이라고 씌여진 비행선이 공중을 날고 있다. 이 비행선은 현지 통신회사가 두테르테의 강력한 마약근절정책에 대한 지지를 나타내기 위해 띄운 것으로 알려졌다. 마닐라=AP뉴시스
필리핀 마닐라에서 22일 '두테르테 대통령'이라고 씌여진 비행선이 공중을 날고 있다. 이 비행선은 현지 통신회사가 두테르테의 강력한 마약근절정책에 대한 지지를 나타내기 위해 띄운 것으로 알려졌다. 마닐라=AP뉴시스

미국이 아시아 진출을 본격화한 19세기 이래 필리핀은 줄곧 동남아지역에서 가장 주요한 ‘미국의 친구’였다. 필리핀이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요지이면서 중국을 견제할 보루라는 전략적 가치 덕분에 양국은 서로에게 소중한 동반자 관계를 유지해왔다. 현재 아시아태평양에서 미국과 군사동맹 관계인 4개 국가(한국, 일본, 호주, 필리핀) 중 필리핀만이 유일한 동남아 국가라는 점은 미국에 있어 필리핀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일지를 미뤄 짐작하게 한다.

미국과 필리핀의 끈끈한 외교관계는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 다른 동남아 이웃 국가들과는 분명히 차별화되어 있다. 오래도록 근절되지 않은 정치부패와 골이 깊은 빈부 격차로 1인당 국민총생산이 3,000달러대에 머무는 필리핀에 미국이 전 세계에서 네 번째로 규모가 큰 대사관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은 이 같은 특별한 관계의 단면을 보여준다. 주한 미국대사를 지내는 등 미국의 아시아태평양지역 외교의 큰 축을 맡아온 성 김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를 필리핀 대사로 낙점한 것도 역시 버락 오바마 정부에게 필리핀이 갖는 의미를 가늠케 한다.

양국 관계는 지난 7월 헤이그 상설 분쟁중재소가 남중국해에서 빚어지는 영유권 다툼의 승자를 중국이 아닌 필리핀으로 선택하면서 끈기를 더할 것으로 기대됐다. 미국 정부는 “분쟁중재소의 결정에 대해 미국은 어느 국가의 이익도 편들지 않는다”라고 밝히며 오직 역내의 자유로운 항행 권리를 지탱한다는 차분한 뉘앙스를 유지했지만 속으로 쾌재를 불렀음은 분명하다. 중국의 ‘구단선(九段線)’이 터무니없는 주장이라는 국제사회의 컨센서스가 확인됨에 따라 중국을 남중국해 북쪽에 묶어둘 명분이 뚜렷해졌고, 이를 끌어낸 필리핀이 한없이 고마웠을 것이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헤이그 분쟁중재소의 결정 직후 필리핀과 미국의 관계는 오히려 이전보다 소원해지는 듯하다. 필리핀이 내달 초 취임 100일을 맞는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의 ‘마약 전쟁’을 반인권 행위로 몰아붙이는 미국에 내정 간섭을 거부한다며 대립각을 세우면서다. 두테르테는 심지어 미국의 식민지배 시절 이야기까지 꺼내며 미국이 필리핀의 인권문제를 지적할 자격이 없음을 강조하기도 했다. 중국의 대양진출을 막아줄 오랜 친구 필리핀이 별안간 거리를 벌렸으니, 미국으로서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필리핀의 외교적 반전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두테르테는 최근 영유권 분쟁 당사국인 중국에 “이제 대화로 풀자”라며 화해의 제스처를 분명히 했다. 강 대 강 충돌을 자제하는 대신, 두테르테가 중국의 필리핀 투자 확대를 요구했다는 후문이다. 지나친 막말과 유혈이 낭자한 마약전쟁으로 ‘필리핀의 트럼프’라 불리며 희화화된 두테르테 대통령이 양대 슈퍼파워 사이에서 교묘히 이익을 도모하는 모범적인 등거리 외교를 펼치고 있는 것이다.

두테르테 정권의 이러한 움직임은 직전 아키노 대통령 시절까지 꾸준했던 친미성향의 필리핀 정ㆍ재계에 큰 변화가 진행되고 있음을 방증한다. 비록 외국인직접투자 등에 있어 필리핀 경제의 미국 의존도가 여전히 막대하지만 경제대국으로 성장하는 중국을 적으로만 돌려세울 수 없다는 매우 실리적인 판단에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세계의 싱크탱크들은 국제사회가 이해하지 못하는 두테르테의 인기 비결 중 하나로 실리 위주 외교를 꼽는다. 최근 싱가포르 소재 동남아연구소(ISEAS)의 말콤 쿡 박사는 “반군과 치안문제, 저성장 해결이 시급한 두테르테에게 중국과의 분쟁은 후순위일 것이다”라며 “실익을 따질 때 중국과는 협상이 가능하다는 판단을 했으며 결국 공을 중국으로 넘겼다”고 말했다. 두테르테의 영리한 계산이 향후 동남아 패권 경쟁의 현장에서 어떤 결과를 빚어낼지 주목된다.

양홍주 국제부 차장 yangho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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