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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났는데… 대피도 못한 쪽방촌 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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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났는데… 대피도 못한 쪽방촌 노인

입력
2018.01.17 04:40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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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동 일대 목조건물 다닥다닥

거주민 40%가 움직임 어렵고

소화전 사용법도 익숙하지 않아

화재 발생하면 참사 가능성 커

5일 이모씨 생명을 앗아간 서울 종로구 돈의동 쪽방촌 화재 현장 앞에 고인을 추모하는 공간이 마련돼 있다. 이상무 기자
5일 이모씨 생명을 앗아간 서울 종로구 돈의동 쪽방촌 화재 현장 앞에 고인을 추모하는 공간이 마련돼 있다. 이상무 기자

‘갑자기 황망히 떠나셔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아무쪼록 험난한 생을 떠나 하늘 저쪽에서도 우리 기억하시고 편히 쉬소서!’(돈의동 주민 일동)

성인 한 명 겨우 누울 ‘좁디 좁은 방’ 750여개가 밀집해 있는 서울 종로구 돈의동 쪽방촌 초입. 새까맣게 타버린 2층짜리 건물 앞에 하얗고 노란 국화꽃 예닐곱 송이가 유난히 화사하다. 지난 5일 화재로 세상과 등을 지고만 이모(68)씨는 생전 사진 속에 담긴 가벼운 미소로 사람들을 맞았다. 이웃들이 간이탁자에 꾸민 고인의 단출한 추모공간엔 평소 그가 즐기던 막걸리와 게맛살과자도 놓여 있었다.

그날 불은 오후 3시50분쯤 1층에서 시작됐다. 101호에 머물던 박모(72)씨가 휴대용 가스 버너로 라면을 끓이다 존 게 화근이었다. 불이 방으로 옮겨 붙자 6ㆍ25전쟁 때 지어진 작은 목조 건물은 금세 불길에 휩싸였다. 2층에서 바둑을 두고 있던 신영만(56)씨는 “연기가 올라와 급히 뛰어 내려갔더니 1층과 건물 입구 쪽이 이미 불로 휩싸여 있었다”고 당시를 전했다.

주민들이 소화기를 사용해봤지만, 역부족이었다. 건물에서 20m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설치된 소화전은 사용법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속속 도착해 진화에 나선 소방대원들이 30분 이상 사투를 벌여서야 겨우 불길을 잡을 수 있었다. 건물에 살던 8명 중 7명은 신씨처럼 대피했다.

1층 제일 구석진 방 102호에 살던 이씨는 혼자 힘으로 건물을 빠져 나오지 못했다. 뒤늦게 구조됐지만 연기를 많이 마셔 숨을 돌려놓기엔 늦은 상태였다. 이씨가 해당 건물로 이사온 지 한 달 반 만에 벌어진 비극이다. “그 양반 몸 가누기 힘들어서 못 빠져 나왔을 거야.” 이씨를 알고 지낸 정모(67)씨는 이씨 사진을 바라보다 한숨을 쉬었다. “디스크 협착이 심했고, 배에 복수도 차 있었다”고도 했다.

주민들은 이씨 죽음이 “남일 같지 않다”고 입을 모았다. 불이 난 건물처럼 오래된 목조 건물이 쪽방촌 절반을 차지하고, 빠르게 대피하기 어려운 몸 상태인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쪽방촌 지원단체 ‘돈의동 해뜨는주민사랑방’ 조사 결과, 뇌경색ㆍ디스크ㆍ무릎ㆍ다리 질병 등으로 움직임이 불편한 주민들이 쪽방촌 전체 주민의 약 40%에 이른다. 돈의동 사랑방 관계자는 “이번 화재처럼 방에서 음식을 해먹다 불이 나는 걸 막으려면 공동 식당이 필요하고, 소화전 사용법 등 화재 대응 교육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서울시도 대책을 고심 중이다. 박원순 시장은 사고 당일 현장을 방문해 “쪽방촌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어 화재에 취약하다. 대책을 마련할 것”이라고 했고, 이후 시 차원에서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주민들은 하루하루 걱정 속에 살고 있다. ‘담배 꽁초를 함부로 버리지 마시오’라는 마을 곳곳의 경고 문구는 주민들의 불안이 스며 있다. 조금만 탄 내가 나면 주민들이 버선 발로 뛰어 나오기도 한단다. 화재 현장 앞에서 만난 주민 박모(70)씨가 말했다. “돈 없으면 비명횡사하는 세상이야. 싼 집에 산다고 이렇게 죽어도 된다는 법은 없잖아.”

글ㆍ사진=이상무 기자 allclear@hankookilbo.com

15일 오후 서울 종로구 돈의동 쪽방촌에서 발생한 화재로 완전히 검게 타버린 건물과 이 화재로 숨진 이모씨의 추모 공간. 이상무 기자
15일 오후 서울 종로구 돈의동 쪽방촌에서 발생한 화재로 완전히 검게 타버린 건물과 이 화재로 숨진 이모씨의 추모 공간. 이상무 기자
5일 발생한 서울 종로구 돈의동 쪽방촌 화재로 숨진 이모씨를 추모하는 글귀. 이상무 기자
5일 발생한 서울 종로구 돈의동 쪽방촌 화재로 숨진 이모씨를 추모하는 글귀. 이상무 기자
5일 오후 불이 난 서울 종로구 돈의동 쪽방촌에 담배꽁초를 함부로 버리지 말라는 경고 문구가 붙어있다. 이상무 기자
5일 오후 불이 난 서울 종로구 돈의동 쪽방촌에 담배꽁초를 함부로 버리지 말라는 경고 문구가 붙어있다. 이상무 기자
5일 오후 불이 난 서울 종로구 돈의동 쪽방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오래된 목조 건물. 불이 난 건물은 6.25때 지어진 목조 건물이었다. 이상무 기자
5일 오후 불이 난 서울 종로구 돈의동 쪽방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오래된 목조 건물. 불이 난 건물은 6.25때 지어진 목조 건물이었다. 이상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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