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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불편러는 위험 경고하는 ‘잠수함 속 토끼’

입력
2017.01.30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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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다짜고짜 나이 어린 사람에게 반말을 쓰는 ‘사장님’들, 누군가의 술 취한 모습을 보고 ‘병신 같다’며 웃는 사람들. 일상 속 숨은 인권차별에 현명하게 불편해하는 법은 무엇일까요? 신혜정 기자가 ‘프로불편러’로 거듭나기 위한 소심한 아마추어의 여정을 시작합니다.

제4차 대통령 하야촉구 집회가 열린 지난해 11월 19일 광화문광장에서 집회를 마친 시민들이 행진을 하다 경찰 차벽에 막힌 내자동 사거리에서 경찰차에 꽃 스티커를 붙였다. 이날 밤 일부 시민들이 의경들의 수고를 덜겠다는 뜻에서 차에 붙은 꽃을 떼어냈는데, 이는 '비폭력 시위의 상징'이란 평가를 받기도 했으나 다른 사람이 붙인 저항의 상징을 떼어낼 권리가 있느냐는 반론을 부르기도 했다. 오대근기자 inliner@hankokilbo.com
제4차 대통령 하야촉구 집회가 열린 지난해 11월 19일 광화문광장에서 집회를 마친 시민들이 행진을 하다 경찰 차벽에 막힌 내자동 사거리에서 경찰차에 꽃 스티커를 붙였다. 이날 밤 일부 시민들이 의경들의 수고를 덜겠다는 뜻에서 차에 붙은 꽃을 떼어냈는데, 이는 '비폭력 시위의 상징'이란 평가를 받기도 했으나 다른 사람이 붙인 저항의 상징을 떼어낼 권리가 있느냐는 반론을 부르기도 했다. 오대근기자 inliner@hankokilbo.com

“왜 다른 사람이 붙인 저항의 표시를 동의도 없이 떼는 거지?”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촉구하는 4차 촛불집회가 열렸던 지난해 11월 19일 늦은 밤. 시민들은 의경들의 수고를 덜기 위해 차벽에 붙은 꽃 스티커를 손수 떼어냈다. ‘비폭력시위’속 가장 평화적인 장면으로 꼽힌 사건이지만, 광장 한 켠에선 이 모습을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머지않아 이들은 저항의 자유를 제한하는 사람들을 향해 국화꽃을 던졌다.

광화문에서 태어난 ‘시민불복종행동(이하 행동)’은 지난 3개월간 한국사회 곳곳의 부조리에 저항해왔다. 지난해 12월엔 아르바이트 노동자들의 임금 84억원을 미지급한 이랜드파크 계열사에 대한 불매운동을 했고, 1월 초에는 ‘가임기여성출산지도’를 향해 비토를 날렸다. 지난 26일 자칭ㆍ타칭 ‘프로불편러’인 시민불복종행동 구성원들을 만나 ‘프로의 길’을 물었다.

프로불편러는 어느 시대에나 있었다

정초라(왼쪽) 씨와 채영진씨. 신혜정 기자
정초라(왼쪽) 씨와 채영진씨. 신혜정 기자

정초라(27ㆍ활동명)씨가 프로불편러라는 말을 처음 듣게 된 건 지난해 말이다. 한 인터넷 기사에 정유라의 초등학생 시절 인터뷰 영상이 나왔다. 댓글에는 어린 초등학생에 대한 외모비하가 넘쳐났다. 화가 난 정씨는 “어릴 적 생김새를 비난하는 당신도 정유라만큼 나쁜 행동을 한 것”이라는 댓글을 달았고, 다른 네티즌들은 일제히 그를 ‘프로불편러’라고 불렀다. 정씨의 문제제기를 ‘논점 흐리기’ ‘과도한 까칠함’이라 몬 것이다.

‘프로불편러’라는 단어는 이처럼 누군가의 문제제기를 ‘쓸데없는 트집잡기’라 비난하는 말이자 입바른 말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억압으로 작용한다. ‘행동’의 대표 엄재희(27)씨는 이 같은 용어가 새로운 현상이 아니라고 본다. 엄씨는 “빨갱이라는 말이 정부에 저항하는 세력을 뭉뚱그려서 비하하는 용어로 쓰였던 것처럼, ‘딴따라 운동권’ 등 매 시대마다 비슷한 용어는 있어왔다”고 설명했다. 채영진(23)씨 역시 “조선 말기 신분제 사회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그 시대의 불편러였던 것 아니냐”고 덧붙였다.

프로불편러가 특별한 것은 이 같은 비난의 말을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만의 정체성으로 승화했다는 데 있다. 정씨는 “그 말을 들은 뒤 스스로 생각하고 고민하는 과정에서 더 좋은 문제제기를 할 수 있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프로의 비결: 타인과 함께 아파하기

엄재희(왼쪽)씨와 김현탁씨. 신혜정 기자
엄재희(왼쪽)씨와 김현탁씨. 신혜정 기자

프로불편러는 ‘잠수함 속 토끼’다. 민감한 후각으로 내부 이산화탄소 농도를 측정해주는 토끼처럼 이들 역시 사회적 위험에 대해 경고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채씨는 “가스 냄새가 나서 ‘위험하다, 빨리 나가자’ 라고 했을 때 ‘너 왜 이렇게 예민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며 “프로불편러들도 사회에서 비슷한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프로불편러의 기본 요건은 구조를 꿰뚫는 눈이다. 고등학생으로서 촛불집회에 나간 김현탁(17ㆍ가명)씨는 ‘대견하다’는 어른들의 말에 웃지 못했다. ‘청소년은 미성숙하다’는 편견이 칭찬의 뿌리였기 때문이다. 김씨는 “사회적 편견을 보지 못하고 웃는 다른 친구들을 볼 때 가장 불편했다”고 말한다.

기본기가 갖춰졌다면 실력을 다져야 한다. ‘공감능력’이 핵심이다. 일부 문제에만 불편해하기 보다는 전반적인 인권감수성을 높여야 진짜 ‘프로’라는 것이다. 채씨는 “노동문제에 날카롭게 반응하면서도 젠더ㆍ소수자 문제에 감수성이 낮다면 진짜 프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며 “자신의 문제에만 매몰되지 않고 타인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어야 변화한다”고 말했다.

덜 착해도 괜찮아

프로불편러들을 짓누르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하나는 ‘나의 비난이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게 아닐까’ 라는 걱정, 또 하나는 ‘말로 비난만 할 뿐 행동하지 않는다’는 사회적 시선이다.

초보 불편러들을 가로막는 것은 대부분 첫 번째 문제다. 정씨 역시 예전엔 불편함을 타인에게 말한다면 그들이 상처받을까 전전긍긍했다. 남들과 조금만 다르게 행동해도 ‘분위기 흐린다’는 사회적 시선도 부담이었다. 하지만 비판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정씨는 “내가 의견을 내기 시작하자 나와 같은 불편을 느끼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며 “세상을 위해 좀 더 뻔뻔하고 이기적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두 번째 문제에 대해 엄씨는 “’말하지 말라’는 억압의 부드러운 버전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김씨 역시 “불편을 말하는 것 자체가 많은 위험을 감수한 것” 이라며 “다른 의견을 존중하지 않는 우리 사회에선 비판 댓글을 다는 것 만으로도 큰 저항”이라고 말했다.

전략적으로 불편해하기

시민불복종행동은 사회적 이슈에 대해 함께 대응해왔다. 시민불복종운동 페이스북페이지.
시민불복종행동은 사회적 이슈에 대해 함께 대응해왔다. 시민불복종운동 페이스북페이지.

갈 길은 여전히 멀다. 프로불편러의 발에 걸리는 돌부리는 셀 수 없다. 하지만 불편러들이 더 많아지고 그들과 함께 말할 수 있다면 변화는 가능하다고 프로들은 말한다.

아직 잠재력을 발휘하지 못한 불편러를 깨우는 방법은 무엇일까? 정씨는 일상적 관계에서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강남역 살인사건’ 같은 사회적 이슈부터 시작하면 이미 각자의 고정관념이 있어 쉽게 공감하지 못한다”며 “나를 잘 이해하는 주변인들과 일상적 불편을 공유하고 고민하면 문제의식을 확장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엄씨는 “프로불편러가 되려면 좀 덜 착해져야 하지만 혼자 하면 힘들 때가 많다”고 고백했다. “불편러가 되는 건 평생 힘든 삶을 자처하는 셈”이라면서도 “많은 사람들을 만나 토론하고 행동하면서 차별없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신혜정 기자 aret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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