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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깽’의 후예, 비정했던 조국에 손을 내밀다

입력
2016.07.21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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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한인회장 안토니오 김씨가 지난 6월9일 저녁 쿠바 아바나의 레스토랑 '카사'에서 손녀인 멜라니(왼쪽), 베이트리즈와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한인 3세와 5세다.
쿠바한인회장 안토니오 김씨가 지난 6월9일 저녁 쿠바 아바나의 레스토랑 '카사'에서 손녀인 멜라니(왼쪽), 베이트리즈와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한인 3세와 5세다.

그와의 첫 만남은 충격이었다. 분명 같은 유전형질의 DNA를 공유하고 몽타주도 비슷한 단군의 후예인데 그의 입에서 속사포처럼 쏟아져 나오는 언어는 스페인어였다. 삼각의 한 꼭지점에 앉은 카리브풍의 쿠바인 가이드가 우리말 통역을 하느라 진땀을 흘린다. 옆 동네 어르신이라고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한인 3세, 쿠바한인회장과의 첫 만남은 이랬다.

안토니오 김, 올해 73세인 그를 만난 곳은 쿠바 아바나의 레스토랑 ‘카사’(CASA)였다. 지난 6월9일 저녁 우리말로 ‘집’이란 뜻의 이 식당은 약간의 계단과 정원, 현관 너머 아늑한 소파를 갖춘 편안한 집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를 만나는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한인회장이 우리말을 하지 못하네’라며 혼자 속으로 중얼거리기 무섭게 그가 손녀를 소개했다. 19, 21살의 멜라니와 베아트리즈는 외견상 완벽한 쿠바사람이었다. 길에서 만난다면 절대로 한인 5세로 추측조차 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짧은 스페인어로 “부에나스 노체스” 한 마디에 그들의 눈동자를 정면으로 맞받고나서야 이날 만남의 시공간적 무게가 느껴졌다.

안토니오 김은 우리 민족의 슬픈 디아스포라(離散)의 주인공이었다. 두 손녀의 핏속에도 이산의 아픔은 현재진행형이다. 그가 살아온 인생과 온실 속 화초 같은 내 삶은 출발선부터 다른데 “한국사람이…”라는 한 마디로 그의 인생에 토를 달 권리가 내게는 없었다.

쿠바는 1905년 사탕수수 농장에 팔려간 멕시코 이민 1세, 애니깽들이 노예계약 기간이 끝난 후 새로 선택한 땅이다. 애니깽은 선박용 밧줄을 만드는데 쓰인 선인장 ‘에네켄’에서 유래된 말로 이들 한인 1세들의 별칭이다. 100여 년 전 한반도를 떠나 지구 반대편에서 낯 설고 물 설은 험한 세상에 적응한 애니깽의 후손과 한반도 토종의 만남은 충분히 역사적이었다.

안토니오 김 쿠바한인회장이 지난 6월10일 아바나의 '호세 마르티 한국 쿠바 문화클럽' 입구에서 방문객들을 맞고 있다.
안토니오 김 쿠바한인회장이 지난 6월10일 아바나의 '호세 마르티 한국 쿠바 문화클럽' 입구에서 방문객들을 맞고 있다.

멕시코 이민 한인 1,033명 중 274명은 1921년 쿠바행을 감행했다. 그들은 아바나 서쪽 100㎞ 지점의 마탄사스 지역에 정착했다. 안토니오 김은 멕시코와 쿠바에서 살던 한인 사이에 태어난 순수 혈통의 한인 3세다. 부모는 집에서 우리말 반, 스페인어 반을 사용하면서도 그에게는 우리말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말은 몰랐지만 김치와 고추장을 먹고 우리 노래를 들으며 환갑잔치를 체험한 그에게 한국은 남의 나라가 아니었다.

애니깽은 혹독한 이민 생활에도 매달 월급의 5%를 독립자금으로 뗐고, 끼니 때마다 한 숟가락씩 쌀을 더는 등 조국을 생각하는 마음도 남달랐다. 이를 주도했던 임천택 선생은 2004년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하지만 안토니오 김은 엄연한 쿠바인이다. 쿠바 공군에 입대, 미그기 조종사를 꿈꾸다 부상을 입고 정비사로 제대한 그는 쿠바혁명과 미국과 단교, 미사일 사태, 최근의 개방무드까지 쿠바의 격동기를 온 몸으로 체험한 증인이기도 하다.

쿠바 한인들의 이민사를 담은 사진
쿠바 한인들의 이민사를 담은 사진

쿠바인으로 살던 그에게 2년 전 한국인임을 되새기게 하는 일이 생겼다. 2014년 광복절인 8월15일 우리 정부의 도움으로 아바나 신시가지에 ‘호세 마르티 한국 쿠바 문화클럽’을 열게 된 것이다. 호세 마르티는 쿠바 독립의 아버지다. 그는 이곳에 쿠바 내 유일한 한국어교실을 열고, 직접 수강생이 됐다. 서툰 우리말로 “안녕하세요? 불고기 김치 맛있어요”라고 말하는 그의 얼굴 한 가득 미소가 번진다.

쿠바에도 한류는 어김없이 상륙했다. 쿠바 국영방송이 지난 2013년부터 ‘아가씨를 부탁해’, ‘시크릿 가든’, ‘내조의 여왕’ 등 한국 드라마를 연속으로 방송하면서 탤런트 윤상현이 쿠바의 연인으로 떠올랐다. 그는 같은 해 쿠바 땅을 처음 밟은 한국 연예인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그 후 ‘꽃보다 남자’와 ‘시티헌터’, 영화 ‘강남 1970’에 힘입어 이민호가 쿠바 소녀들의 애간장을 녹이고 있다. 멜라니는 “슈퍼주니어와 EXO도 좋지만 이민호가 최고”라며 손가락을 치켜 세웠다.

'호세 마르티 한국 쿠바 문화클럽' 한국어교실에 비치된 책. 쿠바인의 수준과 세태에 걸맞게 새로 보충될 필요가 있었다.
'호세 마르티 한국 쿠바 문화클럽' 한국어교실에 비치된 책. 쿠바인의 수준과 세태에 걸맞게 새로 보충될 필요가 있었다.

한류에 힘입어 매주 토요일 이곳 문화클럽은 ‘한류 메카’로 자리매김했다. 팬클럽 회원 200여 명이 이곳에서 한국 영화 DVD도 보고, 한복도 입어 보며, 최신곡에 맞춰 춤도 춘다.

그 문화클럽을 가보지 않을 수는 없었다. 다음날인 10일 아침 문화클럽에는 안토니오 김이 미리 나와 한국어교실과 시청각실, 다용도실, 이민역사 유물전시관 등을 소개했다. 태극기와 한반도 지도, 한복, 색동 고무신, 이민호 사진 등이 골고루 내걸린 이곳 한켠에서 쿠바 이민 선조들의 사진을 소개하는 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이 지난 6월5일 아바나의 '호세 마르티 한국 쿠바 문화클럽'을 방문, 방명록에 글을 남겼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이 지난 6월5일 아바나의 '호세 마르티 한국 쿠바 문화클럽'을 방문, 방명록에 글을 남겼다.

공교롭게도 나보다 닷새 먼저 이곳을 찾은 한국인이 있었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이다. 1959년 쿠바혁명 후 한ㆍ쿠바 국교 단절로 왕래가 끊겨버린 한인 후손들에게도 윤 장관의 방문은 뜻깊은 사건이었다. 방명록에는 ‘쿠바이민 95년을 맞는 시기에 한국 외교장관으로서는 최초로 쿠바를 방문하고, 한인후손회관을 찾게 되어 기쁘다’고 적혀 있었다.

윤 장관이 쿠바 외교장관과 한ㆍ쿠바 수교문제 등을 논의하면서 중남미 33개국 중 유일한 미수교국인 쿠바와 국교 정상화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호세 마르티 한국 쿠바 문화클럽'을 찾은 한국인 여행객들이 안토니오 김 쿠바한인회장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호세 마르티 한국 쿠바 문화클럽'을 찾은 한국인 여행객들이 안토니오 김 쿠바한인회장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연 이틀 통역을 담당했던 에벨리오 두에뇨(45)씨도 한국과 쿠바의 수교를 간절히 바란다고 말했다. 김일성대학과 평양체육대학에서 우리말과 탁구를 배우는 등 북한에서 12년이나 살았던 그는 나훈아의 노래 ‘고향역’을 잘 불러서 ‘나훈아’로 불리고 있었다. 쿠바 현지인 사이에서도 ‘코레아노’(한국인)으로 불리는 그는 1994년 북한에서 귀국한 후 통역 및 가이드로 일하고 있다.

쿠바에는 순수 혈통 78명을 포함한 한인 1,120명이 살고 있다. 한국과 쿠바의 국교 정상화를 누구보다 기대하는 사람들이다. 안토니오 김이 그 대열의 선두에 서고, 손녀들도 바람을 잡는다고 한다. 힘이 약해 백성들을 태평양 너머로 내몬 국가는 이제라도 제대로 나라 노릇을 한 번 해야 한다.

※ 기자에게 실크로드에 대한 눈을 뜨게 해줬던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은 "실크로드는 동서 문명교류의 통로이며, 실크로드 구간을 구대륙(유라시아)에만 한정하는 것은 서구중심적인 사고방식"이라고 말했습니다. 즉, 실크로드의 범위는 신대륙에까지 확장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본 코너의 '시즌2'는 중남미를 둘러보며, 숨어있는 비단길의 자락을 잡아가는 여정인 셈입니다.

jhj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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