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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내일은 챔프" 박시헌-함상명 복싱사제, 다시 주먹을 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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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내일은 챔프" 박시헌-함상명 복싱사제, 다시 주먹을 쥐다

입력
2016.08.16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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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 박시헌 “28년 전 부끄러운 금메달 恨은 못 풀어”

제자 함상명 “부끄럽지 않은 경기… 4년후 금메달 선물”

남자복싱 함상명(왼쪽)과 박시헌 대표팀 감독이 16일 리우올림픽 선수촌에서 2020 도쿄올림픽을 기약하며 화이팅을 외치고 있다. 리우=윤태석 기자
남자복싱 함상명(왼쪽)과 박시헌 대표팀 감독이 16일 리우올림픽 선수촌에서 2020 도쿄올림픽을 기약하며 화이팅을 외치고 있다. 리우=윤태석 기자

‘최선을 다하고 28년의 한 맺힌 그 자리, 최고의 시상대에 함상명 선수를 올려놓으려 했는데 면목 없습니다.’

박시헌(51) 복싱대표팀 감독은 함상명(21)이 리우올림픽 남자복싱 밴텀급(56kg) 16강에서 패배한 15일(한국시간) 페이스북에 이 같은 글을 남겼다. 함상명은 원래 올림픽 출전권을 따는데 실패했지만 같은 체급의 아르헨티나 선수가 출전을 포기하는 바람에 와일드카드로 리우에 왔다. 한국 복싱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그는 16강전에서 중국의 장지아웨이(27)에 무릎을 꿇었다. 2년 전 인천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딸 때 결승에서 꺾었던 상대라 더 아쉬웠다. 함상명은 깨끗하게 패배를 인정했다. 장지아웨이의 손을 높이 들어 예우를 갖췄고 관중석을 향해 큰 절로 인사했다. 경기 다음 날인 16일 박시헌 감독과 함상명을 선수촌 앞에서 만났다.

28년 전 그날, 1988년 10월 2일.

박 감독이 절대 잊을 수 없는 날이다. 88 서울올림픽 마지막 날 복싱 남자 라이트미들급 결승에서 박 감독은 미국의 로이 존스 주니어(47)를 3-2 판정으로 누르고 금메달을 땄다. 하지만 경기 내용에서 존스 주니어가 우세했다. 박 감독도 심판이 자신의 팔을 드는 순간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편파 판정 논란이 거세게 일었고 미국 언론은 들끓었다. 한국 언론도 박 감독을 차갑게 외면했다. 물론 박 감독의 잘못은 아니었다. 그는 링에서 최선을 다해 뛴 죄밖에 없었다. 나중에야 동독이 치열하게 순위 경쟁을 하던 미국의 금메달 개수를 줄이기 위해 심판을 매수해 오심을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당시 박 감독은 고개를 들고 다니지 못했다. 올림픽 직후 조기 은퇴해 교직에 섰다가 2001년 대한복싱협회장에 취임한 은사 김성은 감독의 부름으로 국가대표 코치를 맡았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 참가한 뒤 대표팀을 나왔다가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을 앞두고 다시 감독으로 부임했다. 이 때 함상명을 처음 만났다. 박 감독은 함상명을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마 같았다”고 회상했다. “기본기가 다듬어지지 않았고 힘과 의욕으로만 복싱을 했다. 무조건 돌격하는 스타일이었다”며 웃었다. 함상명은 그보다 한참 전 박 감독과 마주친 걸 기억했다. 경기체고 1학년 때인 2011년 세계복싱주니어선수권 동메달을 딴 직후였다. 함상명은 “우연히 시합장에서 감독님과 만났는데 ‘네가 그 함상명이냐’고 알아봐 주셨다”고 미소 지었다.

함상명이 익살스런 포즈를 취했다. 그는 오른쪽 눈두덩이에 멍이 든 걸 가려야 한다며 오륜기 모양의 선글라스를 꼈다. 그는 비록 16강에서 패했지만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경기와 페어플레이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리우=윤태석 기자
함상명이 익살스런 포즈를 취했다. 그는 오른쪽 눈두덩이에 멍이 든 걸 가려야 한다며 오륜기 모양의 선글라스를 꼈다. 그는 비록 16강에서 패했지만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경기와 페어플레이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리우=윤태석 기자

함상명은 이번 올림픽에서 특유의 저돌적인 플레이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한 대 맞으면 두 대 때리면 된다”는 지론이다. 장지아웨이와 경기 뒤 오른쪽 눈이 부어 잘 보이지 않으면서도 “뼈는 안 부러졌네요”라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리고는 “포기하지 않아 부끄럽지 않다. 다쳐서 아프다고 피하는 건 복싱 선수로서 나약한 모습인 것 같다”고 당당히 외쳤다.

함상명(왼쪽)이 중국 장지아웨이와 펀치를 주고받고 있다. 리우=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함상명(왼쪽)이 중국 장지아웨이와 펀치를 주고받고 있다. 리우=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제자의 모습에서 박 감독은 28년 전 자신을 봤다. 그 역시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스파링 도중 오른손이 부러졌지만 출전을 강행했다. 도핑에 걸릴 까봐 약 한 번 못 먹었다. 뛰어난 순발력과 스피드 덕분에 거의 왼손으로만 경기하고도 결승까지 갔다. 박 감독의 스트레이트 펀치는 당시 국가대표들이 표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정석이었다. 은퇴한 뒤 교사를 할 때 4년 동안 오른손으로 칠판에 글씨를 못 쓸 정도로 후유증이 깊었지만 후회는 없다. 다만 로이 존스 주니어와 승부는 여전히 미련이 남는다. 부상이 없었다면 결승전이 어땠겠느냐고 묻자 박 감독은 “다 지난 이야기다”고 손을 내저으면서도 “진짜 멋지게 한 판 붙을 수 있었는데”라고 말끝을 흐렸다.

박시헌 감독의 현역 시절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박시헌 감독의 현역 시절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박 감독은 리우올림픽에서 함상명이 시상대 맨 위에 오르는 장면을 매일 머릿속으로 그렸다. 제자가 28년 전 자신과 달리 떳떳하게 시상대 맨 위에 서길 간절히 바랬다. 박 감독이 보기에 함상명은 ‘타고난 복서’다. 그는 “함상명은 주먹이 대단하다. 돌주먹으로 유명한 문성길 선배와 맞먹는다. 탄력도 뛰어나다”면서도 “체력이 문제다. 편식 탓이다”고 일침을 놨다. “야채도 골고루 먹어야 에너지원이 만들어져 끝까지 버티는 체력이 길러진다. 함상명은 고기만 좋아하고 스팸이나 3분 요리 같은 인스턴트식품도 즐겨먹는다.”

박시헌(왼쪽) 감독과 함상명이 대화하고 있다. 리우=윤태석 기자
박시헌(왼쪽) 감독과 함상명이 대화하고 있다. 리우=윤태석 기자

한참 잔소리가 이어지자 함상명은 머리를 긁적이며 “여기 와서 김치, 깍두기, 브로콜리도 먹었다”고 대꾸했다. 박 감독은 “꾸준히 그래야 한다. 식습관만 바꾸면 너는 세계 최고의 복서가 될 수 있다”고 했다.

함상명은 만으로 스물 하나다. 2년 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아시안게임을 넘어 2020년 도쿄올림픽에서 전성기의 기량을 발휘할 수 있는 나이다. 함상명은 “첫 올림픽을 치르며 느낀 게 많았다. 앞으로는 식습관 같은 것도 철저히 신경쓰겠다”며 “사람들의 기억에 오래 남는 복서가 되고 싶다”고 포부를 전했다. 박 감독이 도쿄올림픽까지 계속 지휘봉을 잡을 지는 지금으로선 장담할 수 없다. 얼마 전 복싱통합협회장이 새로 뽑혀 집행부와 코칭스태프까지 큰 변화가 예상된다. 함상명은 “감독님이 어디에 계시든 도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 꼭 목에 꼭 걸어드리겠다”고 약속했다.

리우=윤태석 기자 sporti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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