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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몰표의 추억

입력
2017.04.11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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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급제' 후 온갖 권력과 명예를 다 누린 김기춘이지만 그도 낯뜨겁게 여기는 일이 있다. 이른바 '초원복국집 사건'이다. 1992년 14대 대통령선거를 1주일 앞둔 12월 11일 아침 부산의 초원복국에 당시 법무장관이었던 그의 주재로 지역 정부기관장 7명이 모여 지역감정 선동 등 관권선거를 기획하다 도청에 의해 들통난 사건 말이다. 이날 비밀회동에서 김영삼 당선을 기원하며 외쳤다는 '우리가 남이가'는 그 운율과 호소력 덕분에 정치권과 재계 등에서 조직의 단합을 꾀할 때 즐겨 인용하는 구호로 남았다.

▦ 관권선거 음모에서 불법도청 공작으로 성격이 뒤바뀐 이 사건은 정주영과 영남표를 다투던 YS에게 큰 도움이 됐지만 정작 더욱 결집한 쪽은 호남이었다. 박정희 시절 정치공학적으로 조성한 지역감정에 불을 질렀기 때문이다. 1노3김이 싸운 13대 대선 때 89.4%였던 DJ의 호남 지지율은 14대 92.4%,를 거쳐 15대 94.7%로 정점을 찍으며 기어코 그를 청와대로 보냈다. 16대 노무현도 93.4%의 호남지지를 바탕으로 대권을 거머쥐었다. 판세가 일방적으로 이명박에 기울었던 17대를 예외로 하면, 18대 대선 때 89.4%를 얻고도 낙선한 문재인의 아쉬움이 클 법하다.

▦ 이 시기 TKㆍPK로 나뉘는 영남에서도 '몰표'라는 세 결집이 가속화했다. 특히 15대 대선까지 60%대에 머물던 TK의 여권 지지율은 박근혜가 나선 2012년 18대 대선에서 80.5%로 치솟았다. 몰표는 대선에 그치지 않는다. 여든 야든 텃밭에서 공천만 받으면 국회의원 당선은 식은 죽 먹기였다. '우리가 남이가' 혹은 '우리가 넘이여'라는 주문 몇 마디면 다 통했다. 경쟁후보가 "더 이상 대구(혹은 광주)가 막대기만 꽂아도 당선되는 곳이 아님을 보여 달라"고 읍소해도 그뿐이었다. 그렇게 30년을 살았다.

▦ 이제 몰표도 추억이 되려는가. 민주당의 문재인 후보와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가 각종 여론조사에서 80% 안팎의 지지율을 점하며 5ㆍ9 장미대선의 주인공 자리를 예약했다. 보수 후보가 소외된 채 진보ㆍ중도 진영의 두 사람이 맞붙은 운동장에는 과거와 달리 쏠림이 없다. 대통령 탄핵에 거부감이 큰 TK를 제외하면 모든 지역에서 두 사람 지지율 차이는 오차범위 안에 있다. 뿌리가 같으니 '전략적 선택'도 어렵다. 이념과 세대 투표로는 몰표가 나올 수 없다. 박근혜가 지역을 안고 뛰어내린 것일까.

이유식 논설고문 jtino5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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