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태석 기자

등록 : 2018.07.11 04:40

[리셋 한국축구] 지도자 바뀌면 “처음부터 다시”

등록 : 2018.07.11 04:40

<1> 통일성 없는 유소년 시스템

나이따라 배워야할 기술 있지만

감독마다 교육기준 달라 혼선

아직도 전국대회가 진학에 영향

주전 대부분 3학년으로 채워져

중1, 고1 선수들 훈련만 하는 셈

서울 운동장·지방은 행정력 부족

연령별 리그제 도입 현실적 제약

한국 선수들이 지난 달 27일 독일과 러시아월드컵 F조 마지막 경기를 마친 뒤 그라운드에 쓰러져 있다. 카잔=류효진 기자

“왜 축구를 저렇게 밖에 못하나?”

한국대표팀의 러시아월드컵 경기를 보며 답답한 축구 팬이 적지 않았다. 기회를 잡았다 싶으면 크로스는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고, 드리블은 상대 수비 한 명 제치는 게 버겁다.간만에 슈팅을 날려보지만 늘 골문을 외면한다. 한국은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최강’ 독일을 집으로 돌려보내는 2-0 승리로 진한 감동을 줬지만 그건 실력이 아니라 투혼과 열정이 만들어낸 ‘기적’이었다. 이영표 KBS 해설위원은 “해설하면서 선수들에게 이길 수 없는 상대를 넘어서라고 강요하는 느낌이 들 때가 많아 괴롭다”고 토로하며 “한국 축구가 튼튼하고 강해지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러시아월드컵 이후 한국 축구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기 위한 해결책을 3회에 걸쳐 짚어본다. 1회는 ’유소년 정책‘이다.

일관성과 통일성

“16세 때 감독은 동쪽으로 드리블을 하라고 가르치고 17세 때 감독은 서쪽, 18세 때 감독은 남쪽, 19세 때 감독은 북쪽으로 드리블을 하라고 가르치면 선수가 20세가 됐을 때 어디에 가 있겠느냐.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을 것이다.”

대한축구협회가 2013년 유소년 엘리트 육성 시스템을 벤치마킹하기 위해 벨기에로 갔을 때 들은 말이다. 벨기에는 자국의 유소년 축구 시스템 모토를 한 눈에 알 수 있는 이미지도 함께 보여줬다. 똑 같은 벨기에 유니폼이 연령별로 사이즈만 커지는 그림과 함께 ‘The only thing that change is size of shirt(유일하게 커지는 건 셔츠 크기일 뿐)’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는 일관성을 의미한다.

’The only thing that change is the size of the shirt!(유일하게 커지는 건 셔츠 크기일 뿐)’이라는 말은 유소년 정책의 핵심인 일관성을 뜻한다.

벨기에는 네덜란드와 공동 개최한 유로 2000에서 역사상 처음 개최국의 조별리그 탈락이라는 굴욕을 맛본 뒤 대대적으로 유소년 시스템 개혁에 나섰다. 이후 벨기에 모든 유스 팀은 성인 국가대표팀과 동일한 유기적인 4-3-3 포메이션을 쓴다.

18년이 지난 지금 벨기에는 유럽 축구의 최강으로 통한다. 러시아월드컵에서도 1986년 이후 32년 만에 4강 진출에 성공했다. 1987~1993년생인 에당 아자르(27ㆍ첼시), 로멜루 루카쿠(25ㆍ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케빈 더 브라위너(27ㆍ맨체스터 시티) 등 현 대표 주축 선수들이 유소년 투자의 결과물이다.

벨기에가 성공했다고 한국 축구에 똑같은 방식을 이식할 수는 없다. 축구협회는 벨기에 외에도 유소년 시스템이 잘 정착돼 있는 독일과 프랑스를 찾았는데 그 때마다 “우리 걸 그대로 복사할 생각 말고 너희 상황에 맞게 변형하라”는 조언을 들었다. 그러나 세 나라 모두 유소년부터 성인대표팀까지 일관된 축구 철학을 유지한다는 기조만큼은 동일하다.

축구협회는 유럽 선진국의 정책을 조사한 결과를 토대로 한국형 유소년 육성 프로그램인 ‘골든에이지’를 2014년 도입해 각 연령별 수준에 맞는 단계별 훈련을 시행하고 있다. 전국 21개 지역 센터, 5개 광역센터, 축구협회가 직접 관할하는 영재센터 등 피라미드 형태의 3단계로 운영 중이다.

일관성 못지 않은 핵심 가치가 통일성이다.

어린 나이에 덧셈, 뺄셈을 배우고 점차 수학의 난이도가 높아지듯 축구도 12세에 배워야 할 기술이 따로 있고 13세 때 익혀야 할 기술이 따로 있다. 축구협회 유소년 담당 부회장을 역임했던 최순호 포항 감독은 “예를 들어 16세 선수는 전국 어디서 축구를 배워도 같은 내용이어야 한다. 반면 우리는 A지도자에게 배운 게 다르고 B지도자에게 배운 게 또 다르다. 선수들이 혼란스러워 할 수 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축구협회는 수 년에 걸쳐 연구해 완성한 연령별 핵심 프로그램을 곧 보급할 예정이다.

현장에 어떻게 접목할 것인가

보다 중요한 건 어떻게 하면 축구협회의 정책을 일선 학원, 클럽 축구에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게 하느냐다. 현장 지도자들이 축구협회 철학을 공유하고 그 방향에 맞게 가르치는 문화가 정착돼야 한다. 축구협회 유소년 실무 책임자였던 김종윤 경기심판운영실장은 “협회의 엘리트 유소년 정책과 축구 저변이라는 두 지점을 잇는 연결고리가 바로 지도자 교육”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여기서 한국 축구는 ‘대학입시’라는 거대한 현실의 벽과 충돌한다. 축구협회는 2009년 초중고 주말리그 제도를 도입했다. 강 팀과 약 팀 모두에게 균등한 경기 기회를 부여하고 ‘공부하는 운동선수를 육성한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시행 10년째인 주말리그는 ‘식어버린 식빵’이 됐다는 말을 듣는다. 매력 없는 상품이라는 뜻이다.

골든에이지 여자 U-13, U-15 여자선수 합동훈련. 대한축구협회 제공

일선 지도자들이 성적에 구애 받지 않고 소신 있게 지도할 환경이 아니라는 게 문제다. 전국대회 4강에 들어야 대학에 지원할 자격이 주어지는 이른바 ‘4강 제도’는 진작 폐지됐지만 각 대학들은 자체적으로 전국대회 8강, 4강 이내와 같은 모집 요강을 두고 있다. 대학들은 선수 기량을 정량화된 수치로 평가할 수 없으니 최소한의 근거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체육교사 신분인 일부 지도자를 제외하고 여전히 대다수 축구부 감독, 코치 급여는 선수 학부모 호주머니(회비)에서 나온다. 학부모들은 자식을 당장 좋은 상급학교(궁극적으로는 대학)에 진학시키는 지도자를 원한다. 지도자들은 당장 실익이 없어 보이는 주말리그보다 방학 기간 열리는 전국 대회에 목숨을 건다. 기술이 뛰어난 선수보다 빠르고 힘 있는 선수를 우선 기용할 수밖에 없다.

지도자들은 축구협회가 자신들의 처우 개선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축구협회는 모든 급여를 자체 예산으로 충당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맞선다. 대신 일부 지방 교육청을 중심으로 운동부 지도자 급여도 일선 학교가 지급하는 방안이 시행되고 있는데 이의 확대를 위해 축구협회는 교육부와 지속적으로 협의 중이다.

연령별 리그제 도입해야

홍명보 축구협회 전무는 “축구에서는 13~19세가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중학교에 올라가 중1 때 거의 게임을 못 뛴다. 중2 중간부터 게임을 조금씩 뛰고 중3 올라가면 주전이 되는데 8월이면 대부분 경기가 끝난다. 고등학교에 올라가면 같은 현실이 또 반복된다. 가장 중요하다는 6년의 절반인 3년은 훈련만 하는 셈”이라며 “아무리 좋은 능력을 가진 선수도 제대로 성장할 수 없다. 이런 점이 개선되지 않으면 4년, 8년, 12년이 지나도 한국 축구는 똑같을 것”이라고 토로했다. 협회는 지난 4월 독일 출신의 유소년 전문가 미하엘 뮐러(53) 지도자 수석강사 겸 유소년 정책수석을 영입했다. 독일 축구에서 20년 경력을 쌓은 뮐러 강사는 중ㆍ고교 6년 동안 절반 이상 게임을 뛸 없는 한국 축구의 현실을 파악한 뒤 “이러고도 어떻게 9회 연속 월드컵에 나갔느냐”며 놀라워했다고 한다.

축구협회도 연령별 리그제를 서두르고 있지만 현실적인 제약이 적지 않다. 서울의 경우 학교 운동장이 포화상태라 더 많은 경기를 소화할 여력이 안 된다. 평일 야간을 활용하려니 조명탑이 없는 곳이 대다수라 또 문제다. 지방은 서울에 비해 운동장 여건은 낫지만 대회를 안정적으로 운영할 시도협회 행정력이 취약하다. 김종윤 실장은 “(연령별 리그제를) 모든 지역에서 일괄적으로 시작할 순 없고 가능한 지역부터 시행한 뒤 확대해 나갈 방침”이라고 설명했다.

고진감래

유소년 정책은 단기간에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사업이 아니다.

벨기에는 2000년에 유소년 개혁을 단행했지만 성인대표팀이 오히려 부진의 늪에 빠져 고민이 컸다.

벨기에는 2006년 독일, 2010년 남아공월드컵에서 2회 연속 본선 진출에 실패했고 2009년에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이 66위까지 추락했다. 여기저기서 날 선 비판이 쏟아졌지만 벨기에축구협회는 “10년 만 기다려 달라”며 뚝심 있게 밀고 나갔다. 2010년부터 거짓말처럼 반등이 시작됐다. 그 해 벨기에의 FIFA 랭킹은 57위로 올라섰고 이듬 해 41위, 21위, 11위, 4위에 이어 2015년 드디어 랭킹 1위를 찍었다. 한 축구인은 “한국 같은 풍토였다면 벨기에 축구협회 기술위원장은 열 번도 더 잘렸을 것”이라고 일침을 놨다.

독일 역시 유로 2000 조별리그 탈락을 계기로 대대적인 개혁을 선언하고 시스템을 정비했다. 특히 유소년 축구에 과감하게 투자를 해 2014년 브라질월드컵 우승으로 전차군단의 위용을 되찾았다.

‘축구 종가’라며 콧대만 높았을 뿐 월드컵이나 유로 같은 메이저 국제 대회에서는 늘 기대에 못 미쳤던 잉글랜드도 축구협회 차원에서 10여 년 전부터 ‘축구 DNA’를 바꾸자는 정책을 펼쳤다. 잉글랜드축구협회는 청소년 축구를 위한 여러 규정을 만들었는데 ‘코치는 경기 중 지시 금지’ 등과 같은 독특한 조항이 포함됐다. 잉글랜드가 지난 해 U-17 월드컵과 U-20 월드컵에서 연이어 정상에 오른 뒤 이번 러시아월드컵에서 28년 만에 준결승 진출에 성공한 건 우연이 아니다. 김종윤 실장은 “유소년 육성은 지난(至難)한 작업이라는 사실을 축구계 안팎에서 이해하고 기다려줘야만 성공할 수 있다”고 당부했다.

윤태석 기자 sporti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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