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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이야기, 삶과 죽음 뒤에 남는 것

입력
2017.08.11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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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좀 재미있는 거 없나?” 수시로 연락하는 죽마고우 김PD의 첫마디는 늘 똑같다. 방송 일을 하고 있고 유난히 음악을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는 어릴 적부터 재미있는 것을 찾아 다녔던 친구다. 최근 자연다큐 분야에서 독보적이었던 고 박환성 독립PD 장례식장에서 그를 만났다. 박PD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촬영하러 갔다가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해 함께 간 김광일 PD와 현장에서 즉사했고, 결국 유해만 고국으로 돌아왔다. 주요매체들은 하나같이 침묵했지만 가슴 아픈 그의 사연은 몇몇 기사를 통해 전해졌다. 요절한 천재 PD의 장례식장에는 고인을 아는 사람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동료PD, 함께 일했던 작가, 방송계 지인, 가족, 친구와 선후배들이 끼리끼리 모여 앉았고 각자 고인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너무나 슬프고 엄숙한 장례식장인데도 고인에 관한 재미있는 에피소드에 여기저기서 웃음꽃이 핀다. 고인을 기억한다는 것은 그의 성품, 냄새, 얼굴색, 자산 등 단편적 정보가 아니라 그와 함께 나눈 경험, 그가 살아온 이야기들을 기억하는 것이다. 각자가 알고 있는 고인의 이야기들이 모이면 그것은 오롯이 그의 인생이 된다.

김PD와 박PD는 직업 특성상 해외출장이 잦았다. 훌쩍 떠났다가 홀연 나타나기 일쑤였고, 돌아오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곤 했다. 함께 술잔을 기울일 때 최고 안주는 재미있는 이야기였다. 촬영하며 겪었던 어이없는 이야기, 외국에서 만난 특이한 사람 이야기, 함께 일하는 사람에 대한 뒷담화 등 재미난 이야기들이 꼬리를 물었다.

우리가 누굴 만나고 무슨 일을 하는 것은 모두 이야기로 재구성된다. 매일매일 사람들은 각자의 이야기를 만들며 살고 있다. 소통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이야기를 풀어놓는 방식은 서로 다를 수 있다. 미지의 자연과 야생동물의 세계를 탐험하며 촬영했던 박PD는 다큐멘터리라는 방식으로 자연과 동물을 이야기했다. 작가의 경우에는 글로 이야기한다. 자신이 직접 겪은 것, 남에게 들은 것, 상상으로 지어낸 것을 이야기로 만든다. 영화에도 스토리가 있고, 오페라나 연극도 이야기를 담고 있다. 화가는 한 폭의 그림 속에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담고, 만화가는 그림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만화를 사전에 찾아보니 ‘이야기 따위를 간결하고 익살스럽게 그린 그림’이라고 돼 있다. 그러니까 만화가는 그림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이다. 술자리에 가도 좌중을 휘어잡는 이야기꾼이 있어야 재미가 있다. 모임의 고정멤버인 오랜 친구 김작가도 타고난 재담꾼이다.

세상은 온통 이야기 천지다. 매일매일의 사건사고도 이야기다. 역사는 옛날 이야기고, 미래는 가상의 이야기다. 세상에서 제일 비싼 커피인 코피 루왁에는 사향고양이가 커피 열매를 먹고 배설한 이야기가 담겨 있고, 복분자 술에는 요강이 뒤집힌다는 이야기가 따라다닌다. 지난 일들도 우리는 이야기로 기억한다. 어릴 적 친구와 개구리 잡던 이야기, 학창시절 수박 서리를 한 이야기, 군대에서 축구 한 이야기, 신혼살림 이야기 등 모두가 이야기다. 또한 이야기는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갖고 있다. 미담사례를 들으면 마음이 훈훈해지고 슬픈 사연에는 가슴이 먹먹해진다. 재미있는 이야기일수록 오래 기억된다. 그래서 마케팅에서도 스토리텔링이라는 기법을 사용한다. 사람을 만나고 여행하고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지만 결국 머릿속에 남는 것은 이야기다. 이야기야말로 재미의 원천이다. 이야기 본능을 지닌 사람을 호모 나랜스, 즉 이야기하는 인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동물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지만 사람은 죽으면 이름과 함께 이야기를 남긴다. 한 사람의 진가는 그가 살아온 이야기에 있다. 나는 죽어서 어떤 이야기를 남길까. 사람들은 나를 어떤 이야기로 기억할까.

최연구 한국과학창의재단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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